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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국민 국가가 형성되다

by 변교수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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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민 국가가 형성되다

빈 체제의 성립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 각국 대표들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빈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유럽 각국의 지배권과 영토를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자고 결정하였다. 그 결과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면서 보수적인 질서를 지키려는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유럽 각국에서는 빈 체제에 대한 저항이 잇따랐고 독립 전쟁도 전개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지원과 유럽 각국에 있는 친그리스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을 쟁취하였다(1829). 이러한 상황에서 빈 체제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자유주의 운동

프랑스에서는 빈 체제로 부르봉 왕실이 부활하였다. 부르봉 왕실의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전제 정치를 폈다. 이에 맞서 자유주의자들과 파리 시민들이 합세하여 7월 혁명을 일으켰다(1830). 그 결과 샤를 10세는 추방되고 루이 필리프가 새 왕으로 추대되어 입헌 군주제가 수립되었다(7월 왕정). 7월 혁명은 주변 국가로 확산되어 벨기에의 독립과 유럽 각지의 자유주의 운동을 불러왔다.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은 소수의 부유한 시민과 대지주가 지배하는 정치 체제였고 선거권도 제한적이었다. 결국 1848년 파리에서 중하층 시민 계급과 노동자들이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2월 혁명을 일으켜, 루이 필리프를 몰아내고 제2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한편, 2월 혁명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메테르니히가 권력을 상실하고 유럽 각국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 빈 체제는 사실상 끝이 났다.

2월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가, 곧 황제로 즉위하였다(2 제정). 그는 경제 발전과 대외 팽창에 힘썼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제2 제정은 붕괴되었다. 패전의 혼란 속에서 1871년 파리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파리 코뮌이라는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지만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영국의 자유주의 운동

영국에서는 의회의 주도로 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었다. 심사법이 폐지되어 신교도에게 관직이 허용되었고, 가톨릭 해방법이 제정되어 구교도에 대한 차별이 철폐되었다. 또한 1832년의 선거법 개정으로 부패 선거구가 폐지되고 신흥 상공업자 계급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의 혜택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인민헌장을 작성하여 이를 의회에 제출하기 위한 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차티스트 운동). 경제적으로도 곡물법과 항해법이 폐지되는 등 정부의 규제가 완화되어 자유 무역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이탈리아는 여러 왕국으로 분열된 채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은 마치니와 가리발디 등이 민족 통일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사르데냐 왕국 주도로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이 전개되었다.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일으켜 롬바르디아를 비롯한 중북부 이탈리아를 병합하였다. 때마침 가리발디가 이끄는 의용대가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하였고, 이를 사르데냐 왕국에 바쳤다. 이로써 남북이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하였다(1861). 이후 이탈리아는 베네치아와 로마 교황령을 병합하여 통일을 완성하였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독일 지역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가 연방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다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로 관세 동맹이 체결되면서 경제 통일이 진전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2월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전역에서 통일 운동이 일어나 통일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철혈 정책을 내세워 강력한 군비 확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프로이센은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북독일 연방을 창설하였다. 뒤이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남독일의 여러 나라를 연방에 참여시켰다. 이윽고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마침내 통일된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1871).

 

미국 남북 전쟁의 발발

독립을 이룬 미국은 서부 개척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1840년대 말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거대한 영토와 자원, 인구와 시장을 확보하고 경제 성장을 이루어 갔다. 미국 남부에서는 노예 노동을 이용하여 목화를 재배하는 대농장이 발달하였고, 북부에서는 임금 노동자를 이용한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사회적ᆞ경제적 차이는 남부와 북부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노예제 확대에 반대한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남부 7개 주(후에 11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1861~1865). 전쟁 초기에는 남부가 우세하였다. 하지만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앞선 북부가 노예 해방 선언으로 여론의 지지까지 얻어 점차 승기를 잡았다. 결국 4년간의 남북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이후 미국은 빠른 속도로 국민적 단합을 이루었다. 1869년에는 대륙 횡단 철도가 부설되어 영토 통합이 진척되었으며,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어 노동력이 풍부해지고 시장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19세기 말 세계 최대의 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

 

전제정과 개혁 사이의 러시아

19세기에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강하였으나 차르의 전제 정치와 농노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에 일부 젊은 장교들은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며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1825). 19세기 중반 니콜라이 1세는 흑해 방면으로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크림 전쟁을 일으켰지만 패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을 비롯한 내정 개혁을 단행하였다(1861). 그러나 농노 해방은 농민들에게 별다른 혜택을 주지 못하였고 차르의 전제 정치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러시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차르의 전제 정치에 맞서 혁명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농민을 계몽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이후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전제 정치가 오히려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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