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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키다

by 변교수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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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키다

영국 혁명의 전개

16, 17세기 영국에서는 지주층인 젠트리와 도시의 시민 계급이 성장하였고 이들 가운데 청교도들은 의회(하원)에서 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가 전제 정치를 강화하였다. 뒤이어 찰스 1세도 청교도를 탄압하며 함부로 과세하자 의회는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내용의 권리 청원을 왕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1628).

하지만 찰스 1세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전제 정치를 계속하자 의회가 반발하면서 내전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의회파를 이끈 크롬웰은 왕당파를 격파하고 찰스 1세를 처형하여 공화정을 수립하였다(청교도 혁명, 1642~1649). 크롬웰은 청교도주의에 입각한 금욕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는 한편, 항해법을 제정하여 대외 무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독재 정치는 국민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결국 크롬웰이 죽은 후 왕정이 복고되어 찰스 2세가 즉위하였다.

찰스 2세는 친가톨릭적 전제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에 의회는 심사법과 인신 보호법을 제정하여 맞섰다.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도 전제 정치를 강화하자 의회는 그를 추방하고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명예혁명, 1688). 이듬해 의회가 왕에게 권리 장전을 승인받음으로써 영국에서는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 군주제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8세기 초에 스튜어트 왕조가 단절되자 독일의 하노버 공 조지 1세가 즉위하여 하노버 왕조가 개창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에서는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의회 중심의 입헌 군주제가 전통이 되었다.

 

권리 장전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의 효력을 정지하거나 법의 집행을 정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는 주장은 위법이다.

국왕이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위법이다.

의회의 동의가 없는 한 평상시에 왕국 내에서 상비군을 징집, 유지하는 것은 위법이다.

 

미국 혁명의 전개

17세기부터 신앙의 자유와 경제적인 기회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주한 영국인들은 동부 해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식민지인들은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하여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다. 그러나 영국은 7년 전쟁 이후 전쟁 비용을 메꾸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강화하였다. 영국이 인지세를 비롯한 각종세금을 부과하자, 분노한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납세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영국이 식민지에 많은 양의 차를 강제로 구매하게 하자, 식민지인들은 보스턴 항구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 선박에 실린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보스턴 차 사건, 1773). 이에 영국 정부는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식민지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대륙 회의를 개최하고 영국에 탄압 조치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던 중에 영국 군대와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였다(1776. 7. 4.). 이 선언에는 천부 인권, 국민 주권, 저항권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담겨 있다. 식민지 군대는 처음에는 열세에 몰렸으나 워싱턴의 활약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전세를 점차 역전시켰다. 그리고 요크타운 전투의 승리 이후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1783).

독립을 달성한 북아메리카 13개 주는 헌법을 제정하고 연방 정부를 수립하여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연방주의와 삼권 분립에 기초한 아메리카 합중국이 탄생하였다. 미국 혁명은 유럽, 특히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7년 전쟁(1756~1763)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 지방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러시아와 동맹을 맺자, 프로이센이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작센 지방에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과 동시에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고, 영국이 최종 승리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

18세기경 프랑스 사회는 절대 왕정, 신분제를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성직자와 귀족은 정치적ᆞ경제적 특권을 누렸지만 평민은 많은 세금을 부담하면서도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사회를 가리켜 구제도라고 한다. 계몽사상과 미국 혁명의 영향을 받은 시민 계급은 당시의 낡은 제도를 타파하여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자 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계속된 전쟁과 왕실의 사치, 미국 독립 혁명의 지원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6세가 소집한 신분제 회의(삼부회)에서 제1 신분과 제2 신분은 전통적인 신분별 투표를 고집하고, 3 신분은 머릿수 투표를 주장하며 서로 대립하였다. 결국 제3 신분은 국민 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테니스코트의 서약).

국왕이 국민 의회를 탄압하자 파리 시민들은 절대 왕정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농촌에서는 봉건적 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영주의 성을 습격하여 장원의 문서들을 불태웠다. 국민 의회는 농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자유와 평등, 국민 주권, 재산권 보호 등 혁명의 기본 이념을 담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행정 구역을 개편하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후 입헌 군주제와 재산에 따른 제한 선거제에 기초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이 헌법에 따라 국민 의회가 해산되고 입법 의회가 소집되었다(1791).

 

프랑스 혁명의 전개

입법 의회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이 프랑스를 위협하자 혁명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에 시달린 파리 민중(상퀼로트)은 왕궁을 습격하였고, 곧이어 왕권이 정지되었다.

입법 의회를 대신하여 들어선 국민 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한 뒤 급진파인 자코뱅파의 주도로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자코뱅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공안 위원회와 혁명 재판소를 통해 반혁명 혐의자를 처형하는 등 공포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공포 정치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실각하여 처형되었다. 새로 구성된 총재 정부 시기에도 국내외가 혼란하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 정부를 구성하였다(1799).

 

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은 제1 통령이 되어 대프랑스 동맹을 격파하고 프랑스 은행 설립, 국민 교육 제도 도입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여 법 앞에서 국민의 평등을 보장하였다. 이어 나폴레옹은 국민 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였다(1 제정, 1804). 그는 다시 결성된 대프랑스 동맹과 전쟁하여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를 격파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켰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패한 이후에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유럽 대륙과 영국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러시아가 이를 어기고 영국과 무역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1812). 그러나 러시아의 후퇴 전술과 혹독한 추위로 나폴레옹의 군대는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다.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나폴레옹은 유럽 연합군에 패배하여 몰락하였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 중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주의가 확산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항하면서 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의식이 자라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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