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세계를 분할한 제국주의 열강

by 변교수 2023. 5. 16.
반응형

 

Ⅳ 제국주의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
   1 제국주의와 민족운동
   2 두 차례의 세계대전

 

1 제국주의와 민족운동

1. 세계를 분할한 제국주의 열강

제국주의의 성립 배경

산업 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소수의 거대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 자본주의가 나타났다. 그러자 유럽 열강은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값싼 원료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고 잉여 자본을 투자할 곳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았는데, 이러한 열강의 대외 팽창 정책을 제국주의라고 한다.

유럽 각국은 다른 나라와 경쟁하려면 식민지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였다. 국민들도 식민지 획득이 실업과 같은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의 위신을 높여 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여 침략 정책을 지지하였다.

제국주의는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를 문명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전개되었다. 이러한 명분은 백인종은 우월하고 황인종이나 흑인종은 미개하다는 인종적 우월감으로 이어졌으며, 유럽 국가가 비유럽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

일찍이 산업화를 이룩한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주의 정책 추진에 앞장섰다. 이후 통일을 이룬 독일과 이탈리아가 제국주의 대열에 합세하였고, 미국도 남북 전쟁 이후 동참하였다. 뒤늦게 산업화를 달성한 러시아와 일본도 19세기 말에는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제국주의 열강 간의 식민지 획득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세계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영국은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콜카타를 연결하는 팽창 정책을 추진하였다(3C 정책). 프랑스는 알제리를 거점으로 사하라 사막에서 마다가스카르에 이르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을 추진하며 영국과 경쟁하였다. 독일은 아프리카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베를린, 바그다드, 이스탄불(비잔티움)을 잇는 정책(3B 정책)을 추진하여 발칸반도와 서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이는 팽창 정책을 추진하던 영국은 물론 남하 정책을 펼치던 러시아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열강의 아시아와 태평양 분할

제국주의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유럽 열강은 아시아와 인도에 관심을 가졌다. 신항로 개척 이후 포르투갈은 16세기에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였고, 에스파냐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17세기경 인도에 진출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 무역을 주도하였다. 18세기 중엽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물리친 후에는 인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갔다.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에 패한 프랑스는 베트남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수립하였다(1887).

한편,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네시아에 진출하여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플랜테이션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이후 수마트라와 보르네오까지 점령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건설하였다(1904). 미국은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여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제국주의 열강은 태평양에도 진출하여 여러 섬을 점령하였다.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자치령으로 삼았고, 독일은 비스마르크 제도와 마셜 제도 등을 점령하였다. 미국도 괌과 하와이 등을 차지하여 태평양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진출하여 노예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풍토병, 정보 부족 등으로 아프리카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세기에 리빙스턴, 스탠리 등의 탐험가가 아프리카 내륙을 답사하면서 아프리카에 막대한 지하자원과 시장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자 제국주의 열강은 앞을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하였다.

아프리카 분할을 주도한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은 아프리카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추진하였고, 프랑스는 동서로 연결하는 횡단 정책을 추진하여 영국과 대립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등 신흥 자본주의 국가들도 아프리카 침략에 나섰다. 1884년에는 벨기에의 콩고 사유지 선언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이 베를린 회의를 열어 아프리카 분할 원칙에 합의하였다. 이를 통해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이 공식화되어 식민지 획득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1898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파쇼다에서 충돌하여 갈등을 빚었으나(파쇼다 사건), 서로 양보하여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세기 초에는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아프리카의 대부분이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 열강은 사탕수수, 목화, 코코아 등을 재배하는 농장 경영과 고무 수액 채집, 금과 다이아몬드 등을 채굴하기 위한 광산 개발에 원주민들을 동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식민지 수탈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삼았다. 콩고는 광대한 고무 생산지였는데, 산업화 이후 대부분의 기계에 고무 부품이 들어가면서 고무의 수익성이 높아졌다.

레오폴드 2세는 고무 수액을 빨리 얻기 위해 콩고인들을 잔혹하게 착취하였다. 마을을 덮친 벨기에군은 여자들을 볼모로 잡은 다음 마을 사람들이 고무 수액을 가져와야 풀어 주었다. 군인들은 할당된 채집 양을 채우지 못한 사람을 채찍으로 매질하였고, 고무 수액 채집에 협력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레오폴드 2세의 강압적인 통치로 콩고에서는 약 천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