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1.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6. 18.
반응형

일제 식민지 지배와 민족운동의 전개

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한국인을 억압하였다. 한국인들은 3·1 운동, 항일 무장 투쟁 등을 전개하며 일제에 저항하였고, 1920년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벌였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 문물의 유입과 근대 의식의 확산으로 사회 문화에 변화가 나타났다.

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2.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3. 다양한 민족운동의 전개
4. 사회 문화의 변화와 사회 운동
5. 전시 동원 체제와 민중의 삶
6. 광복을 위한 노력

 

1.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일제는 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이후 식민 통치의 최고 기구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1916년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 이 건물은 광복 이후 행정 관청으로 쓰였고, 철거되기 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1995815,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로 조선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다. 이때 철거된 건물의 자재 일부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국사의 창] 1.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다

1차 세계 대전은 인류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대규모의 전쟁이었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은 가능한 인력과 물자를 모두 동원하여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들 국가는 발달한 과학 기술을 적용한 탱크, 전투기, 기관총, 수류탄, 잠수함, 독가스 등 새로운 무기를 전쟁에 투입하면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당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다

 

1차 세계 대전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확보를 위한 경쟁을 벌이며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을 맺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와 3국 동맹(1882)을 맺고 대외 팽창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맞서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와 함께 3국 협상(1907)을 맺으면서 긴장감이 커졌다. 발칸반도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 동유럽의 범슬라브주의가 충돌하면서 민족 대립이 심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4년에 일어난 사라예보 사건1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일어났고, 3국 동맹과 3국 협상 측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전세가 유리하였으나, 프랑스의 저항으로 서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전쟁이 참호전의 양상으로 장기화하였다. 동부 전선에서 독일과 전쟁을 벌이던 러시아는 국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과 단독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한편,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일 동맹을 구실로 내세워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협상국 측에 참전하였다. 일본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의 산둥반도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공격하여 획득하였고, 중국에 ‘21개 조 요구를 제출하여 중국에서의 권익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장기전으로 치닫던 전쟁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피해를 입게 된 미국이 참전하면서 협상국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후 독일의 동맹국들이 차례로 협상국에 항복하였고,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새로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협상국 측과 휴전 조약을 체결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1918). 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승전국과 패전국을 막론하고 유럽 각국의 세력이 약화했지만, 미국과 일본은 경제적 이득을 얻어 국력이 크게 성장하고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커졌다.

 

사라예보 사건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한 청년이 슬라브족의 해방을 내세우며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였다.

 

21개 조 요구

산둥 지방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이권을 일본이 획득하고, 남만주 내몽골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러시아 혁명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나 연이은 패전으로 국내 상황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1917년 노동자와 군인들이 전쟁 중지, 차르의 전제 정치 타도를 요구하며 제정을 무너뜨리고 임시 정부를 세웠다(3월 혁명, 러시아력 2). 그러나 임시 정부가 개혁을 미루고 전쟁을 계속하자 레닌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 정부를 세웠다(11월 혁명, 러시아력 10). 레닌이 이끄는 혁명 정부는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어 전쟁을 중지하고 토지 개혁, 산업 국유화 등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어 반혁명파 세력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수립하였다(1922).

레닌은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을 조직하고,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각국의 노동 운동과 식민지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사회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전후 처리와 베르사유 체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다(1919).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평화 원칙 14개조에 따라 회의를 진행하기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승전국의 이익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회의의 결과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해외에 있던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였고, 군비 축소와 함께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하였다. 이렇게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형성된 국제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한편, 승전국으로 참여한 일본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계승하였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미국은 1921년 워싱턴 회의를 개최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열강 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하여 일본을 견제하였다.

 

평화 원칙 14개조

비밀 외교의 폐지, 군비 축소의 보장, 국제 평화 기구의 창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주권 문제를 결정할 때 관계 정부의 정당한 요구와 식민지 민중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며, 이 원칙을 준수하면서 식민지 문제를 공평하게 조정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 원칙도 담고 있다.

 

워싱턴 회의

중국의 주권 존중과 영토 보존을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산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하였으며, 군비 확장을 제한받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