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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5-1.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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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시 동원 체제와 민중의 삶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의미인 내선일체를 내세웠다. 내선일체를 위해 일제는 한국인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등 일본 국왕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주입하고자 하였다. 이는 한국인을 일본인에 동화시켜 전쟁에 쉽게 동원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국인에게 군수품으로도 사용되었던 가마니를 만들도록 하였고, 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또한, 근로 보국대를 조직하여 도로, 비행장 등을 건설하는 현장에 한국인을 동원하였다.

 

[한국사의 창]  5-1.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하다

중국 베이징 근교에는 루거우차오라는 다리가 있다. 19377, 이곳 근처에서 훈련하던 일본군을 향해 총성이 울렸다. 총을 쏜 사람이 일본군인지 중국군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루거우차오를 점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가 중국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면서 중일 전쟁이 일어났다.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하다

 

대공황과 전체주의의 대두

1차 세계 대전 이후 공업이 발전하면서 세계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중의 구매력이 생산량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여 재고가 쌓여 갔다. 그 결과 주식이 폭락하면서 미국에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1929). 대공황이 유럽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가자, 각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안을 마련하였다. 미국은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뉴딜 정책을 추진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본국과 식민지를 연결하는 블록 경제를 이루었다.

이와 다르게 산업 기반이 취약하고 식민지가 적었던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은 대외 침략을 통해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이 개인보다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는 전체주의를 더욱 강화하였고, 독일에서는 나치당을 이끄는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하였다(1934).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1931) 이듬해에 만주국을 세웠다.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군부 세력이 중일 전쟁을 일으켜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였다(1937).

 

2차 세계 대전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폴란드를 침공하자,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1939). 독일은 노르웨이, 덴마크, 프랑스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소련과 맺은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다(1941). 그러나 소련군의 거센 저항과 혹독한 추위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에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 이후 반격에 나선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몰아냈고,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실각 이후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이어 연합군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프랑스를 해방하였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베를린을 점령하여 독일의 항복을 받아 냈다.

 

태평양 전쟁과 동아시아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이후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내세우며 동남아시아와 인도 방면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하였다. 그러자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미국은 일본군에게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에 경제 제재를 가하였다.

미국과 일본이 대립하는 가운데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일본의 군부 강경파는 도조 히데키를 총리로 내세우고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1941).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광복군을 미얀마 인도 전선에 파견하였다. 전쟁 초기에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점령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미국이 태평양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미국은 태평양의 여러 섬을 차지한 후 일본 본토를 공격하였다. 이후 미국이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자 일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1945.8.).

한편, 이 시기에 일본은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과 타이완을 병참 기지로 활용하였고, 이를 위해 한국과 타이완에서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부족해진 노동력을 보충하고자 징용과 강제 연행을 일삼는 등 인적 물적 수탈을 자행하며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제가 대외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운 대동아 공영권

일제는 중일 전쟁 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하였다. 이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의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주장하였고,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으로 불렀다. 대동아 공영권의 대동아는 일제가 일본, 중국, 만주국,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일부 지역을 아우르기 위해 만든 말이다. 일제는 아시아가 서양 열강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결성하여 아시아에서 서양 제국주의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제는 점령지에서 주요 자원과 노동력을 전쟁 수행 목적으로 수탈하였고, 식민지와 점령지에서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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