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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6-1.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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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광복을 위한 노력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은 일제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자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여 연합군과 공동 작전을 벌였다. 한국광복군 부대원들은 태극기에 자신의 이름을 적거나 굳세게 싸우자, 자유를 찾자.’ 등과 같은 글귀를 적어 독립에 대한 결의와 항일 투쟁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6-1.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다

동무야 잘 싸웠다 / 조선의 혁명군 / 총 끝에 번갯불이 반짝거리어 / 악마의 왜놈들을 쳐부수던 밤 / 악마의 왜놈들을 쳐부수던 밤이 노래는 1930년대 조선 혁명군이 부르던 군가로, 일제에 맞선 조선 혁명군의 항일 투쟁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양세봉이 이끈 조선 혁명군은 1929년에 결성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다

 

1930년대의 만주

만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소련과 가까워 일찍부터 사회주의가 전해졌다. 1920년대부터 우리 동포들은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한 항일 단체를 만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에 3부가 통합 운동을 벌인 결과 국민부와 혁신 의회로 재편되었다. 남만주 일대에서는 국민부가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북만주 일대에서는 혁신 의회의 해체 이후 조직된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는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동한 독립운동가들과 일제의 수탈을 피해 건너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는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일제가 1931년에 조작한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이 서로 배척하기도 하였다.

 

만보산 사건

중국 지린성에서 수로 개착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난 충돌이다. 이 사건은 사상자 없이 마무리되었으나, 일본군은 한국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렸다. 이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한국인들은 국내 거주 중국인들을 습격하였다. 그 결과 중국인의 반한 감정이 확산되어 만주 지역의 동포들과 독립군은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중 연합 작전의 전개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킨 뒤 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 일대는 사실상 일제의 점령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높아진 가운데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남만주 일대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힘을 모아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북만주 일대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승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중국군의 활동이 위축되었고, 독립군의 활동도 점차 어려워졌다.

조선 혁명군은 총사령관 양세봉이 전사한 이후 세력이 약해졌으나 1930년대 후반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동북 항일 연군에 가담하였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의 일부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한국광복군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한국군과 중국군의 연합

조선 혁명군과 중국 의용군의 합의(1932):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다.

인력과 물자는 서로 나누어 사용한다.

합작의 원칙에 따라 국적과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항일 공작을 맡는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항일군의 합의 사항(1931):

한중양군은 최악의 상황이 올 때에도 장기간 항전할 것을 맹세한다.

중동철도를 경계선으로 나누어 서부 전선은 중국이 맡고, 동부 전선은 한국이 맡는다.

전시의 후방 전투 훈련은 한국 장교가 맡고, 한국군에 필요한 군수품 등은 중국군이 공급한다.

 

만주에서의 항일 유격 투쟁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국을 침략하자 중국 공산당은 이에 맞서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만주에 거주하던 한국인 사회주의 세력도 여기에 호응하여 항일 유격대를 조직하였고, 중국의 사회주의 세력과 힘을 모아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 곳곳에 만들어진 항일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하였다(1933). 이후 동북 인민 혁명군은 사상과 관계없이 모든 반일 세력을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확대 개편되었다(1936).

동북 항일 연군 내의 한 부대로 편성된 한인 유격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조국 광복회를 결성하였다(1936). 이들은 국내 민족 운동가들과 함께 함경남도 일대를 습격하여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 기구를 파괴하였다. 이 사건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면서 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이 알려졌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일본군의 대공세로 동북 항일 연군은 큰 타격을 받았다. 만주 지역에서 군사 활동이 어려워지자, 남은 부대는 대부분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이후에도 이들 세력은 만주 지역에 소규모의 부대를 파견하여 유격 활동을 계속하였다. 일부 한인 유격대는 광복 이후 소련군을 따라 국내에 들어와 북한 정권을 세우는 핵심 세력이 되었다.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독립군의 회고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던 독립군들은 이 지역의 험한 지형과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디며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겨울에 제대로 된 방한복을 입지 못하는 때도 있어 동상에 걸리기도 하였다.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군을 비롯한 독립군들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만주 일대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다. 이들의 항일 무장 투쟁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 준다.

 

우리 일행은 하루 1백여 리의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밤에는 화톳불을 지펴 놓고 산짐승의 침입을 경계하면서 숲속에서 자는 고된 나날이었다. ...... 마른 풀잎과 낙엽 위에 모포 한 장씩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더욱이 추운 겨울에 편히 쉬지도 못한 몸으로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행군하게 되면 배가 고프고 다리, 발바닥의 지독한 자극을 받았다.

- 한국 독립군 조경한의 회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높은 산에서 산짐승과 더불어 1937년의 봄을 맞은 영양실조에 걸려 마치 움직이는 해골 같이 보이는 이 사람들은 모두 손발에 동상에 걸렸다. ...... 바로 아래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눈앞에는 손에 잡힐 듯이 조국의 산봉우리가 손짓하는 듯이 보였다.

- 조선 혁명군 계기화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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