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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4-3. 민족 문화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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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민족 문화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경주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는 시상식 사진을 신문에 보도하면서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그려져 있던 일장기를 삭제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 조치를 받았다. 이처럼 일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면서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없애 식민 지배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민족 문화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다

 

한글 연구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해 일본어를 보급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일본어를 국어라 부르고 우리말을 조선어라 부르면서 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의 비중을 크게 높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조선어 교육을 없애고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에 맞서 국어학자들은 한글 연구에 앞장섰다. 이들은 1921년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여 한글날의 시초가 된 가갸날을 제정하고 기관지 한글을 발행하여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이후 이 단체는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등에 의해 1931년에 조선어 학회1로 발전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문자 보급 교재를 만들어 문맹 퇴치 운동을 지원하였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한글 체계는 교과서, 신문, 성경 등에 널리 반영되어 점차 정착되어 갔다. 이와 함께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사전편찬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일제는 한글 연구로 민족의식이 고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어 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1942년 조선어 학회 회원을 대거 검거하고 조선어 학회를 강제로 해산하였다(조선어 학회 사건).

 

훈민정음을 지켜 낸 전형필

전형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우리의 중요 문화재들을 되찾아 왔다. 특히 일제가 조선어 학회 사건 등을 일으키며 한글 말살 정책을 시행하던 중에 전형필은 훈민정음해례본을 소장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은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례를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전형필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훈민정음해례본을 소장하다가 광복 이후에 공개하였다. 한글 학자들은 이 책을 연구하여 한글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창제 원리를 밝혀냈다. 이후 이 책은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어 한글의 과학적인 창제 원리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형필이 문화재 보존에 힘쓴 덕분에 우리는 잃을 뻔한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 낼 수 있었다.

 

한국사 연구

일제는 한국 침략과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를 왜곡하였다. 총독부는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고,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여 정리한 조선사를 만들어 한국사의 독자성과 발전성을 부정하는 식민 사관을 퍼뜨리려 하였다.

역사학계는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맞서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박은식, 신채호 등은 민족주의 사학을 발전시켰다. 박은식은 국혼을 강조하며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침략과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신채호는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등을 저술하였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 사학은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은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물 사관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려는 사회 경제 사학의 흐름도 있었다. 유물 사관은 사회주의에 기초한 역사관으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물질적인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화로 보았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여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과정을 걸어왔음을 주장하고 식민 사관의 정체성론을 반박하였다.

한편, 실증적 연구 방법으로 역사를 연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엄밀한 문헌 고증을 통해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하였고, 1934년에 진단 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행하여 연구 성과를 알려 나갔다.

 

식민 사관

일제는 한국의 역사가 외세의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전개되었고(타율성론), 발전 없이 정체되었으며(정체성론), 한국인은 잘못된 민족성을 가졌기 때문에 당파를 만들어 싸움을 한다(당파성론)고 주장하였다.

 

조선학 운동

정약용의 저서를 모은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는 등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 속에서 민족의 고유한 특색을 찾아내 문화적으로 민족의 주체성을 유지하려는 민족운동이다.

 

종교계의 활동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종교계는 일제의 회유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족운동과 사회사업, 교단 혁신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대종교의 일부 신자들은 국권 피탈 이후 만주에서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천도교는 개벽, 신여성등의 잡지를 만들어 민족의식을 높였고, 청년 여성 소년 운동 등 대중 운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교는 고아원, 양로원을 세우는 등 사회사업을 확대하였으며, 신자 중 일부는 만주에서 의민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개신교는 교육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기독교 계통의 일부 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불교에서는 일제가 한국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제정한 사찰령을 폐지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을 주도한 한용운은 이후 만당을 결성하여 항일 운동과 불교 개혁 운동을 이어 갔다.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추구하면서 저축 운동, 허례허식 폐지, 금주, 단연 등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광단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 신자 중 일부가 1911년 만주에서 조직한 무장 독립 단체이다. 이후 중광단은 북로 군정서로 개편되었다.

 

사찰령

1911년 일제가 한국 불교를 억압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제정한 법령이다. 사찰을 병합 이전 폐지할 때는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의 법령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육 활동

일제는 제1차 조선 교육령(1911)을 발표한 이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에 중점을 두고 사립 교육을 통제하였다. 보통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 역사 교육을 강화하였으며, 수신(도덕) 수업에서 일본 국왕의 순종적인 신민이 될 것을 강요하고, 실업 교육을 실시하여 단순 기술을 익힌 노동자를 길러냈다.

일제의 이러한 교육 정책에 맞서 민족 운동가들은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가르쳐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게 하려는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립 학교와 강습소, 야학, 개량 서당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하였다. 일부 학생과 지식인은 야학을 열어 농민과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취하였다.

1920년 한규설, 이상재 등이 조직한 조선 교육회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현을 위해 활동하였고, 차미리사 중심의 조선 여자 교육회는 여성 교육 보급과 여성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언론 활동

일제는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외에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인의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계몽 활동을 전개하자 정간, 압수, 삭제 등의 방법으로 한글 신문을 통제하였다.

1936년에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총독부가 동아일보에 무기 정간 조치를 내렸다.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고, 언론도 이에 순응하여 점차 친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황국 신민화에 방해가 되는 언론사를 탄압하였고, 결국 194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였다.

 

일제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폐간

일제는 한국인의 사상을 통제하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언론을 철저히 단속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0년에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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