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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4-4. 대중문화가 유행하고 문예 활동을 전개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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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대중문화가 유행하고 문예 활동을 전개하다

레코드는 소리를 기록하였다가 축음기에 올려서 재생하는 원반 형태의 음반으로, 국내에는 개항 이후 유입되었다. 이후 1920년대에 대중가요가 유행하고 축음기가 보급되면서 레코드를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레코드를 축음기에 재생하면 공연장에 가지 않고도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레코드는 인기 있는 문화 상품 중의 하나였다.

대중문화가 유행하고 문예 활동을 전개하다

 

연극과 영화

일제 강점기 연극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판소리, 가면극 등 전통적인 공연이 위축되었고, 이수일과 심순애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장한몽과 같은 신파극이 인기를 끌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토월회가 민중 계몽을 주장하며 신극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극예술 연구회가 만들어져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극을 공연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인 동양 극장이 만들어졌다.

영화는 192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대중문화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였다.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제작사인 조선 키네마가 설립되면서 한국인들의 영화 제작도 점차 활기를 띠었다. 1926년에는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발표하여 영화 발전의 커다란 전기를 이루었다. 이 영화는 나라 잃은 민족의 울분과 설움을 그려 내어 대중의 큰 호응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서양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으며, 변사가 대사를 읽던 무성 영화를 대신하여 유성 영화가 만들어졌다.

연극과 영화가 대중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자, 일제는 이를 탄압하면서도 자국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친일적 성향의 예술 활동이 늘어나기도 하였다.

 

토월회

1923년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신극 운동 단체이다.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다

조선 총독부는 1927년 경성 방송국을 설립하여 라디오 방송을 식민 통치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한편, 라디오 방송은 음악과 드라마 등 새로운 형태의 대중문화를 전파한 근대 문화의 창구이기도 하였다. 경성 방송국에서 일본어 방송과 한국어 방송을 각각 운영하면서 한국인 청취자도 점점 증가하였다.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라디오 방송은 국악과 드라마 채널이었다.

중일 전쟁 이후 조선 총독부는 라디오 방송을 전시 동원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방송을 통제하고 군국주의적 성격의 프로그램을 늘렸다. 라디오 방송의 시보에 따라 궁성 요배, 국민 보건 체조, 정오의 묵도를 하게 하는 등 일제는 라디오 방송을 이용하여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문학과 예술 활동

1910년대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의 주도로 계몽적 성격의 문학이 유행하였고, 3·1 운동을 계기로 다양한 문예 사조가 등장하였다. 창조, 폐허, 백조등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 자연주의 문학과 식민지 현실에 관심을 둔 사실주의 문학이 함께 유행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고,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식민지 현실을 외면한 순수 문학 경향이 나타났다. 이육사, 윤동주2 등은 저항 의식을 담은 문학을 발표하였다.

음악계에서는 1920년대 이후 서양 음악의 영향으로 가곡과 동요가 만들어졌다. 이때 현제명이 고향 생각, 윤극영은 반달등 민족적 정서가 짙은 곡을 작곡하였다.

한편, 해외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1936애국가를 작곡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이상범, 안중식, 이응노 등이 한국 전통 회화를 계승하여 발전시켰고, 고희동에 의해 정착된 서양화는 김관호, 나혜석, 이중섭 등이 이어 갔다.

 

대중가요와 대중 잡지

윤심덕이 노래한 사의 찬미의 유행과 축음기, 레코드, 라디오의 보급으로 대중가요가 유행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트로트라 불리는 대중가요가 등장하여 인기를 얻었다. 이 밖에도 판소리가 창극에 의해 전승되고 성장하였다.

1920년대에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종합 잡지가 많이 발간되었다. 1920년대 초 중반 천도교에서 발간한 개벽은 정치, 사회, 문학 등을 다루었고, 1926년에는 취미 등을 위주로 한 별건곤이 창간되었다. 여성들은 삼천리, 신여성3 등을 통해 유행의 흐름을 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는 각종 잡지에 일제의 침략 전쟁 미화, 내선일체에 동조하는 친일 논조의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문화의 변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은 영화 아리랑

192610, 단성사에서 개봉한 아리랑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울분과 설움을 잘 표현한 영화이다. 주인공 영진은 정신 이상을 앓던 중 자신의 여동생을 희롱하는 일제의 앞잡이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진은 제정신이 돌아왔고, 이후 경찰에 잡혀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저는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 장면은 당시 일제의 식민 통치에 억압받던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명장면으로 손꼽혔고, 대중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대중 잡지 별건곤

별건곤1926년에 개벽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당하자, 그 대신 발간한 월간 잡지이다. 별건곤의 건곤천지와 같은 뜻으로, 별건곤은 별천지, 별세계라는 의미이다. 계몽적 성격이었던 개벽과는 다르게 별건곤은 취미와 실익을 위주로 하여 소설, , 기행문, 만화, 광고 등을 수록하였다.

이 밖에도 논설, 인터뷰 등 다양한 읽을거리를 담았다. 당시 해외에 다녀온 사람들이나 유명 인사를 주로 인터뷰하였는데, 19298월호에서는 나혜석과의 인터뷰를 실어 나혜석의 해외 유학 시절 이야기 등을 다루었다.

 

문학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폭로하고, 일제에 맞서다

1920년대 이후 국내에 사회주의가 들어왔다. 청년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문학계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현실의 계급 모순을 비판하는 신경향파 문학이 대두하였다. 최서해의 탈출기는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으로,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던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육사는 절정을 발표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는 식민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가 드러난다. 한편, 최남선, 이광수 등은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 문학 활동을 하였다.

 

나는 여태까지 세상에 충실하였다. ......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속였다. ......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어떤 험악한 제도의 희생자로 살아왔다. ...... 허위와 요사와 표독과 게으른 자를 옹호하고 용납하는 이 제도는 더욱 그저 둘 수 없다. ...... 이 사상이 나로 하여금 집을 탈출케 하였으며, XX단에 가입하게 하였다.

- 최서해, 탈출기, 1925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 1940

 

◼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

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다가 유행 가수로 전향하였다. 1926년 윤심덕이 노래한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 국적의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여 노래한 번안곡으로, 윤심덕이 가사를 썼다. 이 노래의 가사는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이다. 이 노래가 크게 유행하면서 외국 유명 음반 회사들이 국내에 진출하였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와 레코드의 홍수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대중가요 음반이 인기 있는 문화 상품이 되었다.

 

체육 활동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다

일제 강점기에는 야구, 축구를 비롯한 구기 종목과 자전거 경주, 권투, 스케이트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체육 활동이 대중화되었다. 1920년 조선 체육회가 조직된 후 축구 대회, 야구 대회 등이 열리면서 국내에서 스포츠의 유행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부터 열린 경평 축구 대회는 경성과 평양의 축구팀이 실력을 겨루는 행사였다. 경성 축구팀은 연희 전문학교와 보성 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평양 축구팀은 숭실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미국인 선교사가 청년들을 모아 만든 황성 YMCA 야구단은 국내 최초의 야구팀이었다. YMCA 야구단은 1909년에 열린 도쿄 유학생 야구단과의 시합에서 전력을 강화하였고, 1911년에는 오산 학교, 대성 학교 등과의 경기에서 이겼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모든 구기 종목 대회를 금지하면서 축구, 야구 등의 체육 활동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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