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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항일 의병 운동과 의열 투쟁이 전개되다

by 변교수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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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일 의병 운동과 의열 투쟁이 전개되다

사진은 1900년대 초의 의병에는 어린 소년, 유생, 포수, 상인,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당시 영국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을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어차피 싸우다 죽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라며 의지를 보여 주었다.

 

단발령과 의병 봉기

1895년 명성 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지방 유생층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유인석, 이소응, 김도화 등 유생들은 조선 왕조의 보호를 궁극적인 목표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농민, 동학농민군의 잔여 세력 등과 함께 지방 관청을 공격하고 개화파 관리들을 처단하거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을사늑약과 의병 재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을사의병). 전직 관료인 민종식, 최익현 등이 국가 존폐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봉기하였는데, 민종식은 의병을 모아 충청남도의 홍주성까지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최익현이 일으킨 의병은 전라북도 각지를 장악하였으나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물러났다. 이후 최익현은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어 순국하였다. 한편, 평민 출신의 의병장 신돌석1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경상북도 내륙과 동해안 일대에서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항일 의병장 유인석과 최익현

유인석과 최익현은 보수적 유생층을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며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위정척사 사상에 기반을 둔 의병 활동은 항일 운동이자 반제국주의 운동이었고, 일제 강점기 무장 독립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유인석의 격문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미 이를 갈았는데 참혹한 일이 더하여 부모에게서 받은 머리털을 풀 베듯이 베어 버리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 이에 감히 의병을 일으켜 마침내 이 뜻을 세상에 포고한다.

최익현의 격문

작년 10월에 저들이 한 행위는 만고에 없던 일이다. 억압으로 한 조각의 종이에 조인하여 5백 년 전해 오던 종묘사직이 망하였으니 ......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의 혼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미7조약과 의병의 확산

1907년 일본이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자, 이를 계기로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퍼지었다(정미의병).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의병 투쟁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양반 유생과 전직 관료 외에도 농민, 상인, 포수 등 다양한 신분이 참여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의병 지도자들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여 13도 연합 부대(13도 창의군)를 편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각국 영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에 패하면서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에도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끈질기게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과 관련된 우편 취급소, 금융 조합, 철도, 전선 등을 파괴하였고, 일본에 협조하는 일진회원, 헌병 보조원 등도 공격하였다.

 

일본의 의병 진압

의병 투쟁이 지속되자 일본은 대대적인 군사 작전으로 의병을 진압하였다. 특히 호남 지역의 의병들이 지속적으로 항전하자, 일본군은 남한 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 부대의 근거지가 될 만한 촌락과 가옥을 초토화하고 양민을 학살하였다(1909). 일본의 대공세로 의병의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의열 투쟁의 전개

을사늑약 체결 이후 각계각층에서 조약 반대 투쟁이 전개되었다. 고위 관료와 유생들은 조약의 폐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으며,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글이 신문에 실렸다. 전 현직 관료인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등은 자결로 저항하였다.

기산도 등이 을사5적을 처단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다가 사전에 체포되었고, 나철(나인영) 오기호 등은 자신회라는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연해주에서 의병 투쟁을 벌이던 안중근은 1909년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하기 위해 중국 하얼빈에 온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이재명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 국권을 지키는 것이라 여기고, 명동 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의열 활동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국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때,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하였다. ...... 러일 전쟁은 황인종과 백인종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일본을) 원수로 여겼던 마음이 사라지고 같은 종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편이 되었다. 통쾌하도다! 백인종의 선봉을 (일본이) 크게 부수었다. ...... 한국과 청의 뜻있는 이들이 기뻐한 것은 일본의 정략이나 일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러운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다. 슬프다! ......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점거하였다. ...... 일본의 명성과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다.

전명운과 장인환의 의거

스티븐스는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여 한국에 이익이 되는 일이 많다.”라고 발언하였다. 이후에도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격분한 전명운과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스티븐스 저격을 사전에 협의하지도 않았다. 19083, 거사 당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이때 총성을 듣고 달려온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이들의 의거 활동은 당시 교포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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