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개화 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5. 22.
반응형

3. 개화 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다

고종은 수신사 파견 전에 김기수를 만나 들을 만한 모든 일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반드시 기록해 오라.”라고 거듭 당부하였다고 한다. 일본에 도착한 수신사 일행은 일본의 주요 인사를 만나고 근대 시설을 살펴본 후 돌아왔다.

 

개화 정책의 추진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정부는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조사하였다. 1차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일본의 근대 시설을 시찰하였다(1876). 일본과의 조약 개정을 위해 파견된 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보고 돌아왔다(1880). 조선 정부는 이들의 시찰 의견을 바탕으로 대외 관계의 변화에 대응하고 근대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또한 군사 제도를 개편하여 5군영을 무위영 장어영의 2영으로 통합하였고, 일본인 교관의 훈련을 받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교련병대)을 창설하였다.

정부는 1881년에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의 관료들을 비밀리에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제도와 법률, 공장 등을 조사하고 국왕에게 보고서를 올려 개화 정책의 자료로 삼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여 중인 자제들을 이끌고 청에 가서 무기 화약 기계 제조법을 배우게 하였다. 정부의 재정 부족으로 인원이 줄고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일찍 돌아오게 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기기창3이 설치되었다. 한편, 정부는 미국과 수교한 이후 미국에 답례 사절단을 파견하여 근대 시설을 살펴보게 하였다(1883).

통리기무아문

의정부와 별도의 기구로 조직되어 외교, 무역, 군사 등 부국강병과 관련된 개화 정책을 주관하였다

기기창

한성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

 

최초의 미국 사절단의 구성은 어떠하였을까?

1883년 조선은 미국에 전권대신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답례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을 구성할 당시 통역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하자 청의 역관인 오례당을 영어와 중국어의 통역으로 뽑았고, 청의 중서학당에서 유학하여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하였던 고영철도 사절단에 포함하였다. 사절단 일행은 일본에 한 달간 머무르며 미국에 갈 준비를 하였는데, 그때 주일 미국 공사관으로부터 미국까지 일행을 안내할 사람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하여 미국인 퍼시벌 로웰과 일본인 영어 통역가인 미야오카 쓰네지로가 사절단에 합류하였다. 11명의 인원이었던 사절단은 이처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19세기 후반 보수적인 양반 유생들은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1860년대 천주교가 퍼지고 서구 열강이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자 유생들은 통상에 반대하였다. 이항로, 기정진 등은 척화 주전론을 내세우며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지지하였다. 1870년대 강화도 조약의 체결 무렵에는 최익현 등이 왜양일체론을 내세우며 일본의 개항 요구에 반대하였다. 1880년대 들어 개화 정책이 시행되고 조선책략이 퍼지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 및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개화 반대 운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퍼지었다. 반외세 반침략의 성격을 띤 위정척사 운동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임오군란

개화 정책이 추진되자 양반 유생뿐만 아니라 구식 군대의 군인과 도시 하층민도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정부의 재정 지출이 늘어 백성의 세금 부담이 커졌고, 일본으로 곡물이 수출되면서 쌀값도 크게 올랐다. 이로 인해 도시 하층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구식 군대는 군제 개혁 후에 설립된 신식 군대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13개월 만에 급료로 지급된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이에 분노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1882).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정부 고관들의 집을 공격하였다. 또한,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여기에 한성 주변의 도시 하층민까지 합세하면서 군란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군란 세력은 경복궁까지 쳐들어가 민씨 일파를 처단하고 민씨 일파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왕비를 찾았으나 왕비는 이미 피신한 상황이었다. 고종이 흥선 대원군에게 군란의 수습을 맡기면서 흥선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였고 개화 정책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한 청이 흥선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지목하여 강제로 데려갔다.

 

청의 내정 간섭

청은 군란을 진압한 후 조선 정부에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의 체결을 강요하고 양화진과 한성을 개방하게 하는 등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였다. 또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마건상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였다. 한편, 일본은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해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습격받은 일을 구실로 조선에 제물포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배상금을 물리고 공사관을 호위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을 한성에 주둔시켰다.

 

도시 하층민은 왜 임오군란에 가담하였을까?

19세기 무렵에 한성의 사대문 주변 지역인 왕십리, 이태원 등에는 구식 군대의 군인과 그 가족들, 그리고 상당수의 하층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정부의 재정 부족으로 인해 필요한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들은 도성 근처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도성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개항으로 인해 쌀 수출이 활발해지면서 국내의 쌀값이 폭등하게 되자 날품 팔이로 살아가는 이들은 크게 고통을 받게 되었다. 경제적인 피해를 당한 도시의 하층민들은 개항과 개화 정책으로 인해 더욱 피해를 당하였다고 생각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군란 세력이 더욱 커지고 군란은 약 1개월 정도 지속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