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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다.

by 변교수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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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다.

1875102, 일본의 한 신문에는 운요호의 강화도 공격과 관련해 조선 연해를 측량한 일을 일본 정부가 조선 정부에 통고하지 않았다. 강화도에 배가 들어간 일은 조선이 금지하였는데, 멋대로 들어갔으니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일본은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하였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에 나서면서 조선의 대외 정책이 변하고 문호 개방을 주장하는 세력이 힘을 얻었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운요호를 강화도에 보냈다. 운요호의 예고 없는 접근에 강화도의 수비대가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는 영종도에 상륙하여 살상을 저질렀다(운요호 사건, 1875). 이후 일본은 병력을 보내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논의를 거쳐 개항을 결정하고 일본과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을 체결하였다(1876).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일본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을 포함한 3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에 조선의 연안에 대한 측량권과 영사 재판권(치외 법권)을 인정하였다. 이어서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부속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일 수호 조규 부록에서는 거류지 설정과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의 유통을 허용하였다. 조일 무역 규칙에서는 양곡의 수출입 허용, 정부 소속 일본 선박의 항세 면제 등을 규정하였고 이후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를 허용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은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에 임한 상반된 모습

조선 정부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나서면서 이 협상을 일본과 전통적으로 맺어 왔던 교린 관계의 연장선으로 여겼다. 반면, 오경석을 중심으로 한 초기 개화사상가들은 서양의 외교 체제를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려 하였다. ‘대일본국 황제 폐하조선 국왕 전하로 차등을 두어 표기한 조약 원문을 각각 대일본국대조선국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여 조약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옛날의 우호를 다시 세운다.’라는 구절을 넣어 국교를 재개하는 명분만 얻었을 뿐,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본의 요구 사항을 대부분 받아들인 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거중 조정

조약을 맺은 국가가 제3국과 분쟁이 있을 경우 조약을 맺은 상대국이 중간에서 해결을 주선한다는 것이다.

 

개화파, 어떻게 형성되었나?

고종은 1873(고종 10) 흥선대원군을 제치고 친정에 나서면서 대외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 1876(고종 13)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수신사, 영선사, 신사유람단을 연이어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진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개화정책에는 1880(고종 17)에 파견된 제2차 수신사가 특히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은 일본주재 청국공사관의 참찬관인 황준헌(黃遵憲)이 작성한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종은 이러한 청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대미수교를 추진하였으며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882(고종 19) 46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미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은 많은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김홍집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이 그 과녁이 되었다. 병조정랑 유원식의 상소 를 신호탄으로 전국 각지에서 척사상소가 밀어닥쳤다. 이러한 반발 때문에 개화정책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고종은 개화정책을 꾸준히 밀어붙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종은 자신의 개화 의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젊은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사유람단이다. 1881(고종 18) 12월 개화정책의 추진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었는데 신사유람단에 파견되었던 인물들이 모두 이 기구에 전진 배치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장파 관료로서 원로 대신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던 고종에게는 든든한 정치적 지원군이 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진 정치세력이 바로 개화파였던 것이다.

 

개화파의 사상적 뿌리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이 개화파 형성의 정치적 계기가 되었지만 이를 위한 사상적 기반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되고 있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박규수였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박지원은 대표적인 북학파로서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학풍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전통적인 화이론에서 탈피하여 북경을 통해 발달된 문물을 섭취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박규수도 이러한 조부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중국을 통해 입수한 해국도지 등을 활용하여 지구의를 직접 제작하기까지 하였다.

박규수는 1874(고종 11)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사랑방에 드나드는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 조부의 문집인 연암집을 강의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해주었다. 훗날 박영효는 자신을 비롯하여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킬 주역들이 박규수 대감의 사랑방에서 처음 평등사상을 배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서유견문으로 유명한 유길준은 후일 어렸을 적에 시를 지어 박규수 대감께 보여드렸더니 재주가 이토록 뛰어난데 왜 시무(時務)의 학문을 하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무의 학문이란 북학파의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은 개방적이고 실용적 학문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 훗날 영선사로 중국에 건너가는 김윤식은 박규수의 문집을 직접 간행한 점으로 그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개화파는 박규수를 통해 북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북촌의 양반자제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오경석과 함께 유홍기도 들 수 있다. 오경석은 역관으로서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밝은 인물이었고 유홍기는 의원(醫員)으로 해국도지, 영환지략등 신서를 연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북촌의 양반자제들 사이에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당시 항간에서는 백의정승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오경석은 박규수가 사신으로 중국에 갈 때 역관으로 수행한 바 있다. 사상적으로 기맥이 통하고 있던 사이였던 셈이다. 이렇게 개화파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모두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강화도 조약 전후에는 통상개국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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