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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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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

1894년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은 지속 되었으며, 1901년경에도 이러한 운동이 계속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불공평한 세금과 지배자들의 착취에 항의하며 농민들의 권리와 생활 개선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조선 사회의 불평등과 농민 계층의 억압에 대한 항쟁이었다.

 

1.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의 무기는 죽창이나 농기구가 대부분이었고, 기껏해야 화승총 정도가 있었다. 농민군은 대나무를 쪼개 장태를 만들고 그 안을 볏짚이나 솜으로 채워 총알을 막는 데 활용하였다. 이에 반해 관군과 일본군은 소총과 기관총 등 근대식 무기로 무장하였다. 이러하듯 무기에서 큰 차이가 났으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동학의 확산과 교조 신원 운동

개항 이후 청일 상인에 의해 영국산 면직물이 싼값에 들어오면서 면포를 짜서 팔던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이 늘어 곡물 가격이 오르자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커졌다. 개화 정책으로 늘어난 정부의 재정 지출은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이후 농민 봉기가 크게 늘고 동학에 가담하는 농민들이 많아졌다.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이 포접제의 조직망을 정비하고 포교에 힘쓰면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까지 확산되었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지방관들은 동학을 탄압하였고 농민들에게 동학 교도의 누명을 씌워 수탈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동학교도들은 1892년부터 충청도 공주, 전라도 삼례, 한성 등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3년부터는 외세 배척 운동도 나타나 한성의 외국 공사관 등지에 외국인을 배척하는 벽보가 붙었다.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김제)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종교적인 요구 외에 일본과 서양 모두를 배척하는 구호가 제기되는 등 점차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부 농민 봉기

대표적인 곡창 지대인 전라도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부정부패와 횡포로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농민들은 1894년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조병갑은 이미 도주하였지만,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으며, 부패한 향리들을 붙잡아 다스렸다. 이에 정부가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자 농민들은 군수의 다짐을 받고 스스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장흥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파견되어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이고 가족까지 체포하자 농민들의 분노가 다시 거세졌다.

 

1차 봉기

고부 농민 봉기에 가담한 농민들에 대한 처벌이 이어지자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무장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백산으로 이동한 후 농민군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이어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라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를 담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백성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서남쪽의 정읍, 고창, 무장, 함평 등을 점령하였다. 중앙에서 정부군을 파견하자 황룡촌(전남 장성)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전주성 함락에 놀란 정부는 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도 조선 내 일본인 보호를 구실로 대규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농민군은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여 정부군과 전주 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 각지에 자치적 개혁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안을 실천해 나갔다.

 

청일 전쟁과 삼국 간섭

전주 화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청일 양국의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청에게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의하였다.

청과의 교섭에 실패하자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아산만에 상륙해 있던 청군을 공격하였다(청일 전쟁, 1894~1895). 일본군은 성환 전투에 이어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청의 본토까지 진격하여 뤼순과 웨이하이웨이까지 점령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1895). 이에 따라 청은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인정하고 일본에게 랴오둥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했지만,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삼국 간섭, 1895). 그 결과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

 

2차 봉기

청과 벌인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조선 정부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일본군 타도라는 반침략의 기치를 내세우며 다시 봉기하였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과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군은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논산에서 합류하였다. 이때 전라도와 충청도는 물론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등에서도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부대를 상대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크게 패하였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는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 진압 작전을 펼쳤고 양반, 향리들이 조직한 민보군도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결국, 189412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고, 이듬해 각지의 농민 봉기도 모두 진압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끝이 났다.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

동학 농민 운동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개혁하려는 반봉건적 성격과 함께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나라를 지키려 한 반침략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일부 반영되어 실현되었으며,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항일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과 태평천국 운동

조선의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의 태평천국 운동은 개항 이후의 사회 혼란 속에서 종교 조직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운동이라는 유사성을 지닌다. 1차 아편 전쟁 이후 농민 생활이 어려워지자 청에서는 홍수전이 상제회를 조직하고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1851). 동학 농민군이 폐정 개혁안을 내세운 것처럼 태평천국군도 천조 전무 제도를 통해 토지를 골고루 분배하고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할 것 등을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지도층이 분열하고 한인 관료와 지주층이 향용을 조직하여 이들을 공격하면서 태평천국 운동은 끝이 났다(1864). 동학 농민 운동과 태평천국 운동은 농민들을 억누르던 봉건 질서를 없애려 하였고 반 외세적인 성향을 띠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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