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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을 수용하다.

by 변교수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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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와 도교, 풍수지리설을 수용하다.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은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하였다. 당시 그는 귀족들이 전통 신앙의 근거지로 신성시하던 숲에 절을 지었다는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차돈은 목이 잘리는 벌을 받는 순간에도 불교가 융성하기를 기원하였는데, 그의 목을 자르자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에서는 불교를 공인하였다.

삼국의 불교 수용

삼국의 왕실은 천신 신앙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세력도 각각의 시조를 신으로 섬겼다.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부족적인 전통이 강한 토착 신앙으로는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에 삼국은 왕실이 앞장서서 불교를 수용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후반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불교 수용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을 겪다가 6세기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삼국은 불교를 이용해 왕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를 합리화하였다. 불교의 전륜성왕을 왕과 연결하게 했고, 신라에서는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여 왕실과 부처의 집안을 동일시하였다. 이로써 부처를 믿는 것과 왕을 따르는 것이 같다고 강조하였다.

삼국 시대의 불교는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비는 호국 불교의 성격을 띠었다. 고구려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였고, 백제는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신라는 황룡사와 분황사를 세우는 등 호국 성격의 대규모 사찰을 지었다. 신라 선덕 여왕은 불교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고, 원광은 세속 5계를 지어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또한, 삼국의 왕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 행사를 열어 사회 통합을 꾀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의 불교 대중화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의 불교는 당에서 유학한 승려들이 활동하면서 교리에 대한 학문적 철학적 이해가 깊어졌다. 또한, 원효와 의상 등의 활약으로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더욱 많은 사람이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원효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내세우는 한편, 여러 종파의 대립을 없애고자 화쟁 사상을 주장하였다. 더불어 아미타 신앙3을 전파하여 하층민들도 불교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당에 유학한 의상은 신라 화엄종을 열었으며 화엄일승법계도로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을 건립하여 제자를 키웠고, 관음 신앙을 전파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승려가 신라 불교의 위상을 높였다. 원측은 당에 건너가 법상종의 발전에 이바지하였고, 혜초는 인도를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신라 말 선종의 유행

통일 이후 신라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화엄종과 법상종 등 교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교종은 점차 세속화 보수화되었고 신라 말의 사회 혼란에 대응하여 국가 종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종이 확산하였고 승탑6과 탑비도 유행하였다. 선종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처음 전해 내려왔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달리 참선 수행을 통한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실천적 경향이 강하였다. 신라 말에 선종은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던 호족들의 취향에 부합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호족의 후원 아래 선종은 9산선문으로 대표되는 사찰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선종은 지방 문화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새로운 사회 건설에 필요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발해의 불교 발달

발해에서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불교가 유행하면서 수도 상경성을 비롯한 주요 지역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발해 역시 삼국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문왕을 높여 부른 칭호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에는 금륜성법등 불교의 전륜성왕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문왕의 딸인 정효 공주 묘는 무덤 위에 탑을 쌓고 그 주변에 절을 세워 공주의 묘를 지키게 하였다.

발해는 고구려 불교를 이어받고 당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불교 문화를 발전시켰다. 발해의 석등8과 이불 병좌상 등에서 발해 불교가 고구려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발해와 당이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발해의 승려들이 당에 유학하여 불교 교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일본과의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교의 전래

삼국 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도교가 전래하여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도교는 신선 사상을 바탕으로 산천 숭배, 민간 신앙 등이 결합하여 불로장생과 현세수복을 추구하였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신선 그림과 도교의 방위신으로서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 준다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백제의 산수 무늬 벽돌에는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고, 백제 금동 대향로에는 불교적 요소와 더불어 도교의 이상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도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7세기경 연개소문은 불교와 연결된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왕에게 도교의 융성을 건의하였다. 그는 당에 도사 파견을 요청하고 사찰을 도교 사원으로 만드는 등 도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풍수지리설의 수용

풍수지리설은 산, 하천, 땅이 이루는 형세가 인간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삼국이 도읍을 정하거나 수도를 옮길 때 지리적 조건을 살핀 것이나 신라의 석탈해가 호공의 집터를 길지로 보고 빼앗았다고 하는 이야기 등은 삼국 시대에도 이미 풍수지리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을 알려 준다.

신라에서는 삼국 통일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더욱 깊어졌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이 더욱 체계적인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신라 사회에 확산시켰다. 풍수지리설은 각 지방의 지리적 중요성을 일깨워 수도인 금성(경주)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와 국토에 대한 관념을 바꾸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신라에서는 지방에 사찰의 터를 잡거나 호족 세력이 근거지를 마련할 때 이러한 풍수지리설을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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