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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하늘을 숭배하며 국가가 성장하다.

by 변교수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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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대 사회의 종교와 사상

19931212,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주차장을 건설하던 중 공사장 근처 논바닥에서 금동으로 된 향로가 발견되었다. 진흙이 진공 상태를 만들어 주어 향로는 온전한 모습으로 출토될 수 있었다. 용이 뻗어 올라가는 형태의 향로 받침 위에 연꽃 모양의 몸체가 얹혀 있고, 뚜껑에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1. 하늘을 숭배하며 국가가 성장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에 만들어진 농경 무늬 청동기를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양 갈래의 나뭇가지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솟대와 관련이 있다. 고대 사람들은 하늘과 땅을 오가는 새를 신성하게 여겨 고대 사회의 유물 중에는 새를 표현한 것이 많다.

 

 

선사 시대 원시 신앙의 등장

만주와 한반도의 구석기인들은 사냥의 성공이나 다산을 기원하며 여러 예술품을 남겼다. 신석기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연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자연 현상이나 특정 동물, 영혼 등을 숭배하면서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의 원시 신앙이 등장하였다. 특히 농경과 밀접하면서 천문, 기상 변화와 관련된 태양은 대표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선사 시대 사람들이 남긴 여러 바위 그림에서도 태양을 표현한 듯한 문양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의 출현과 천신 신앙의 등장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성장하면서 통치자와 지배 집단은 자신의 기원을 초월적 존재인 천신과 연결하여 권력을 뒷받침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신 신앙과 선민사상이 등장하였다. 고조선과 이후 등장한 초기 국가들은 천신 신앙을 통치에 활용하였다.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에는 천신의 아들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고 하는 천신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고조선의 통치자는 천신의 자손임을 내세워 연맹체의 우두머리이자 제사와 정치를 주관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냈다.

 

제천 행사와 건국 이야기 속 천신 신앙

군장이 다스렸던 동예와 삼한에서는 천신을 섬기는 제천 행사를 개최하여 공동체의 화합을 끌어냈다. 동예에서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삼한에서는 5월과 10월에 제사를 지내고 국읍에서는 천군이 천신을 섬기는 의례를 주관하였다.

부여와 삼국, 가야의 지배층은 건국 이야기와 국가 의례에 천신 신앙을 담았다. 부여는 시조인 동명을, 고구려는 시조인 주몽을 하늘과 연결하여 시조가 신성한 존재임을 드러냈다.

한편, 부여에서는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고, 고구려에서는 10월에 동맹4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이때 연맹의 대표들은 천신과 시조에게 제사 지내며 왕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 온조의 건국 이야기와 부여 동명의 후예 구태의 건국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와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의 건국 이야기에서는 천신 강림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백제와 신라, 가야가 천신 신앙을 통해 왕의 권위를 높였음을 알 수 있다.

 

천손 의식과 독자적 천하관의 형성

삼국은 천신 신앙에 기초하여 건국의 정당성을 밝히고 왕권 강화와 왕실의 안정을 꾀하였다. 삼국의 왕실은 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냄으로써 왕이 속한 집단이 연맹을 구성하는 다른 집단보다 우월함을 내세웠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의 졸본에 시조인 추모왕(주몽)의 사당을 세웠고, 백제는 온조왕 때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신라도 시조인 박혁거세5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한편, 삼국은 영토를 넓히고 통치 제도를 정비하는 등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 가운데 왕위의 계보를 정리하여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때 왕실의 시조가 천신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내세우며 정통성을 강조하였고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5세기경에 건립된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추모왕의 건국 이야기와 함께 광개토 대왕이 온 세상에 권위를 떨쳤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광개토 대왕이 대왕’, ‘태왕등으로 불렸고, 이 시기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내세우며 자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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