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고려의 통치 체제와 국제 질서의 변동

by 변교수 2023. 5. 20.
반응형

3. 고려의 통치 체제와 국제 질서의 변동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에 있는 한 바위에는 왼손에 약그릇을 올려놓고 미소를 짓는 불상이 있다. 불상의 옆에는 고려 경종 때 석불을 수리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황제께서 오래 사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의 황제만세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고려가 자신을 스스로 황제의 나라로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1. 후삼국을 통일하고 통치 체제를 정비하다.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차전놀이가 벌어진다. 차전놀이는 나무를 교차하여 만든 기구에 대장이 올라타 상대를 밀어내면 승리하는 놀이다. 이 놀이는 지금의 안동 지역에서 벌어진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고려 왕건은 안동 호족들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를 기념하면서 차전놀이가 전승되었다고 한다.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의 통일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10국의 혼란이 지속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거란이 요를 세우고 송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송과 요가 대립하였다. 송은 문치주의 정책을 펴 군사력이 약하였기 때문에 거란의 점령지를 인정하고 해마다 거란에 물품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편, 신라 말 사회가 혼란하여지자 지방에서는 호족이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견훤과 궁예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면서 후삼국이 성립하였다. 견훤은 옛 백제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궁예는 북방 지역 호족들의 지원으로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송악의 호족인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후백제의 금성(나주)을 점령하는 등 공을 세웠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다. 궁예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호족을 탄압하고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여 불교계의 반발을 샀다. 호족 세력은 이러한 궁예의 정책에 반발하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918).

태조 왕건은 고려라는 국호를 회복하고 연호를 천수로 정한 뒤 수도를 다시 송악으로 옮겼다.

고려 건국 직후에는 후백제가 고려보다 우세하였다. 궁예 지지 세력이 반란을 꾀하였고, 옛 백제 지역의 호족들도 고려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에 태조는 겸손한 태도로 호족을 대하고 호족의 딸과 혼인하여 호족 세력을 포섭하였다. 또한, 신라와 화친하여 신라의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 고려는 점차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후백제에서 왕위 다툼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해 오자 고려는 후백제 정벌을 준비하였다. 신라의 경순왕도 다시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여겨 고려에 통합을 요청하였다(935). 마침내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후고구려의 국호

궁예가 건국 초기에 실제로 내세운 국호는 고려(고구려)였다. 이후 주몽이 세운 고구려(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자를 덧붙였다.

 

왕권 강화와 체제 안정을 위한 노력

태조 왕건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서경(평양)을 중시하면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 유민을 포용하고 거란을 배척하였다. 신라와 후백제 출신 인물을 지배층으로 받아들였으며,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태조가 사망한 이후 공신들의 힘이 강해 혼란이 일어나자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을 펼쳤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호족과 공신들의 경제력을 약화하고, 과거제를 도입하였다. 또한,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였다. 뒤를 이은 경종은 전시과를 실시하여 호족과 공신들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켰다. 성종은 즉위 후 최승로의 의견을 수용하여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정치를 시행하였다. 당의 제도를 바탕으로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국가 행사에 유교 의례를 도입하였다. 현종은 즉위 이후 성종 때 폐지된 팔관회를 다시 개최하였다. 4

 

통치 체제의 구조와 운영

고려는 당의 36부제를 나라의 실정에 맞게 고쳐 26부의 중앙 정치 제도5를 갖추었다. 중서문하성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상서성이 6부를 관리하며 정책을 집행하였다. 왕은 비서 기구인 중추원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였다. 이 밖에도 감찰 기구인 어사대, 화폐와 곡식 출납을 담당하는 삼사가 있었다.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신은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에서 회의를 열어 정책을 결정하였고, 중요한 안건은 회의 참여 인원을 늘려 다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재신과 추신은 6부를 비롯한 관부의 장관을 겸하며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관여하였다.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관리는 대간이라 불리며 왕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비판할 권한과 왕의 관리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서경권을 가졌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다. 중앙에서는 지방에 사신을 보내 세금을 거두었고, 중앙 관리를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지방을 통제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려는 전국을 경기, 5도와 양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여 행정을 살폈고, 도 아래에는 주 군 현을 두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는 북계와 동계를 두어 병마사를 파견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지방관이 주재하는 고을이 주현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을 감독하였고, 주현보다 속현의 수가 많았다. 중요한 주현은 계수관7이 되어 몇 개의 주현을 통솔하며 중앙의 명령을 집행하였다. 주현과 속현 외에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 등이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리를 등용하였다. 과거는 제술과와 명경과 잡과 승과가 실시되었고, 무과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공신이나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자손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공무원과 유사한 고려 시대의 관리

고려 시대의 관리는 오늘날의 공무원처럼 국가 행정을 담당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거나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었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의 글 중 목 내밀고 한번 나가고 싶으니 부디 도와주시면 얼마나 좋겠소.”라는 구절에서 고려 시대에도 관리가 되기를 선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리가 된 후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기준을 통과하여야 했다. 우선 근무 기간을 충족해야 하였지만, 근무 기간만 채웠다고 승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임기 동안 성실하였는지를 조사해서 성적을 매긴 후 결과에 따라 승진하였다. 근무 성적은 출퇴근 시간과 휴가 일수를 지켰는지로 평가하였다. 출근 시간은 사시(오전 9)였고, 퇴근 시간은 유시(오후 5)였다. 휴일은 명절과 매달 1, 8, 15, 23일 등이었고, 1년에 54일 정도로 지금의 120일가량과는 차이가 있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