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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유학이 발달하다.

by 변교수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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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학이 발달하다.

2006년 인천 계양산성의 유적에서 토기 및 기와 등의 유물과 함께 백제 또는 신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이 발견되었다. 이 목간은 소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아래와 윗부분이 잘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5각으로 깎인 목간의 각 면에는 먹으로 유교의 대표 경전인 논어의 구절이 적혀 있다.

 

삼국 시대 유학의 수용

삼국 시대에는 중국과 교류하면서 유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수용하였다. 삼국은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할 관료가 필요하여지자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쳤으며, 지방에는 경당을 두어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는 유학 지식에 밝은 오경박사를 두어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신라에서는 젊은이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고, 이 사실은 임신서기석에 나타나 있다.

삼국은 유학을 관료의 육성과 충, 효 등 도덕 규범을 강조하는 데 활용하였다. 이후 종묘를 설치하고 국가 의례를 행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면서 점차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유학의 수준이 높아지고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면서 삼국에서는 역사서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삼국의 왕실은 역사서를 편찬하여 국력을 드러내고 왕실의 권위를 높여 백성의 충성심을 모으고자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일찍이 유기100권을 편찬하였으며, 영양왕 때에는 이문진이 이를 바탕으로 신집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서기를 저술하였고,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이사부의 건의로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현재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통일 이후 신라와 발해의 유학 발달

통일 이후 신라는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삼고 유교 진흥 정책을 펼쳤다. 신문왕은 국학을 설립하여 체계적인 유학 교육을 하였다. 원성왕 때에는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평가하여 관리를 선발하고자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유학을 보급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유학 진흥 정책으로 신라에서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6두품 출신이 많았는데, 강수는 외교 문서의 작성에 능하였고, 설총은 이두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진골 출신인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와 명망 있는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을 지어 신라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였다.

발해는 당에서 유교 경전을 비롯한 여러 서적을 들여와 문적원에서 관리하였다. 또한, 유학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중앙 정치 조직인 6부의 명칭에 유교 덕목이 반영된 것은 발해에서 유교 이념을 중시하였음을 알려 준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와 발해의 많은 학생이 당에서 유학하였다. 이들은 당의 국자감에서 공부하며 빈공과에 응시하였다. 한편, 최치원을 비롯한 신라의 6두품 출신 유학생들은 당에서 귀국한 후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중앙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들은 지방에 은둔하거나 호족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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