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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신분 질서가 변화하다

by 변교수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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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신분 질서가 변화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민들은 모판에 모를 미리 길러서 논에 옮겨 심는 모내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러자 정부는 모내기 철에 가뭄이 들면 한 해 농사를 망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모내기법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모내기법을 실시하면 수확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에 모내기법은 더욱 퍼지었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농업의 변화

조선은 농업을 국가 경제의 근본으로 삼아 건국 초부터 농업을 장려하고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세종 때에는 농민의 실제 경험과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간행하였다. 양난 이후에는 논농사에서 모내기법(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퍼지었다. 이에 따라 수리 시설이 크게 늘고 두레에 의한 공동 노동 방식이 보편화하였다. 모내기법은 잡초를 제거하는 데 드는 노동력을 절약해 주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늘려 주었다. 또한, 모내기법의 실시로 이모작과 광작이 가능해졌다. 광작으로 일부 농민은 부농이 되었지만, 많은 농민은 부세와 고리대의 부담 등으로 토지를 잃고 빈농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서는 소작농들의 지대 납부 방식이 타조법에서 도조법으로 바뀌어 갔다.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도 점차 신분적 종속 관계에서 경제적 계약 관계로 변화하였다. 한편, 농민 중 일부는 인삼, 담배, 채소 등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재산을 늘렸다.

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상인 자본의 지원을 받아 제품을 만드는 선대제가 활발해지고, 임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제 수공업도 널리 퍼졌다. 광업 분야에서는 17세기경부터 민간 광산의 채굴이 이루어졌고, 은광 개발이 활발해졌다. 광산 개발 전문 경영인인 덕대는 상인 물주의 자금으로 채굴업자, 채굴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산을 운영하였다.

상업의 발달과 상인의 성장

조선 초 국가 주도로 운영되었던 상업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민간 주도로 변화하였다. 대동법 시행 이후 정부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층이 성장하여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전국에 장시가 활성화되었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렸으며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보부상3은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장시를 이동하며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 주었다.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사상(私商)들이 등장하였다. 정조 때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자 사상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 등은 18세기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도고 상업을 전개하였다. 한편, 교통의 요지와 포구 등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이를 무대로 선상, 객주, 여각 등도 활발한 상업 활동을 벌였다.

대외 무역의 발달

국내 상업이 발달하면서 대외 무역도 활기를 띠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국경 지대에서는 무역을 위한 시장이 열렸고, 상인들은 사신 왕래에 동행하여 무역하였다. 청에 수출한 주요 품목은 금 은 인삼 등이었고, 청으로부터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을 수입하였다. 일본에는 인삼 쌀 무명 등을 팔았고, 일본으로부터 은 구리 후추 등을 수입하였다.

화폐의 전국적 유통

조선 후기에는 국내의 상업 경제가 발달하고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화폐 사용이 늘었다. 숙종 이후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고, 대동법 시행으로 조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가 확대되어 화폐 유통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대규모 상거래에서는 환, 어음 등의 신용 화폐도 사용되었다. 한편,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하여 유통 화폐가 부족해지는 전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농민층의 분화와 신분 질서의 변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에 영향을 주었다. 양반층의 분화가 일어나 일부 양반은 향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농민과 처지가 다를 바 없는 잔반으로 몰락하였다. 농민 중 일부는 광작으로 부농이 되었으나 다수의 농민은 소작농, 임노동자, 영세 상인으로 몰락하였다. 부농들은 납속과 공명첩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신분 상승을 하거나 양반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였다. 양반이 된 뒤에는 향안에 이름을 올려 군역과 부역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중인들도 신분 상승을 꾀하였다. 서얼들은 집단 상소 운동을 펼쳤고, 정조는 유득공, 박제가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용하기도 하였다. 기술직 중인들도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중인의 신분 상승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노비들은 도망하여서 양인으로 행세하거나 납속책이나 군공을 이용해 신분 상승을 하였다. 신분 질서의 변동으로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수가 크게 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줄었다. 이에 영조 때에는 양인 확보를 위해 노비종모법을 시행하고 순조 때에는 국가가 소유한 노비를 해방하였다.

 

향촌 지배 체제의 변화

조선 후기의 정치적 경제적 변동 속에서 부를 축적해 새로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한 부농층을 신향(新鄕)이라고 하였다. 이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의 지배권에 도전하면서 전통 사족인 구향과 신향 사이에 향전이 일어났다. 지방관은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신향을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향이 약화하였으나 신향이 향촌 사회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수령의 권한이 강해졌다. 사족의 이익을 대변하였던 향회는 도결을 비롯해 수령의 세금 부과를 자문하는 기구로 변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세도 정치기 수령과 향리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졌다.한편, 향촌에서 양반의 권위가 약화되자 양반들은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동 단위의 자치 조직인 동약 등을 시행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 하였다.

 

조선 정부는 공명첩을 왜 발행하였을까?

공명첩은 이름을 적는 곳이 비어 있는 관직 임명장이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이와 같은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공명첩은 실제 관직을 준 것이 아니고 명목상의 관직을 준 것이었다. 그러나 공명첩을 받으면 호적에 기록하고 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정부는 양난 이후에도 국가 재정이 어렵거나 흉년으로 어려워진 백성을 돕기 위해 수시로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공명첩의 발행 과정에서 지방관과 향리들의 비리가 심하였고, 관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조선 후기 신분제 동요의 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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