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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농민 의식의 성장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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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농민 의식의 성장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다.

조선 후기에 농민들은 억울한 일을 알리거나 특정 인물을 저주하기 위한 글을 써 벽에 붙였다. 이와 같은 글을 벽서라고 하였으며, 농민들은 벽서를 통해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벽서는 대개 장시나 포구, 마을 입구나 관아의 대문, 장승 등 사람들의 주의를 쉽게 끌 수 있는 곳에 붙였다.

 

사회 불안의 심화

세도 정치 시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고통이 심하였다. 경작되지 않는 땅에 세금이 부과되고 각종 부가세까지 더해져 농민들은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부담하였다. 또한, 양반이 늘고 상민이 줄어들자, 관청에서는 어린아이와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일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군포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비로 위장하거나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기도 하였다. 삼정 가운데 환곡의 폐해가 특히 심하였다. 관청에서는 환곡을 고리대 형식으로 운영하여 백성의 부담을 더하였다. 수령과 향리의 부정이 심해지면서 환곡을 빌리지 않았는데도 이자를 내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또한,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면서 많은 농민이 고향을 버리고 떠돌아다녔다. 이들 중 일부는 산간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으며, 일부는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곳곳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과 수탈, 사회 혼란은 농민 봉기의 배경이 되었다.

삼정의 문란 노전 마을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는 통곡 소리 / ...... 시아비 상복 막 벗고 갓난아기는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 삼대가 군적이 실리다니 /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 이정은 으르렁거리고 마구간 소마저 몰아가네 /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 자식 낳아 군액 당한 것 한스러워 그랬다네. - 애절양

 

농민 의식의 성장

지배층의 수탈로 농촌 사회가 어려워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점차 높아졌다. 농민들은 사회 문제와 지배 체제의 모순을 깨닫고 지배층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농민들은 소청이나 벽서(괘서), 투서 등 소극적인 형태로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나 지배층의 횡포가 심해지자 농민들의 저항은 점차 적극적인 형태로 변하였다. 항조나 거세, 집단 항의 시위 등이 나타났고 이러한 저항은 마침내 대규모 농민 봉기로 발전하였다. 특히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부를 축적한 요호부민의 불만이 컸다. 이들은 경제력은 갖추었으나 정치 권력과 사회적 특권에서는 배제되었으며, 환곡과 도결 등으로 지배층에 과도한 수탈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불만이 쌓인 요호부민은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킬 때 이를 배후에서 지원하거나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몰락 양반이나 서얼, 중인 등도 농민 봉기에 참여하였다.

항조 거세

항조는 소작료를 낮추고 소작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항쟁이고, 거세는 납세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요호부민 넉넉하다 부유하다 백성

조선 후기에는 농민 중에서 지주로 성장한 사람들과 상인, 광산업자, 공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19세기 들어 이들을 요호라 통칭하였다.

 

 

홍경래의 난

평안도 지역은 중국 무역의 통로로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광산이 모여 있었다. 이에 대청 무역으로 부를 얻은 신흥 상공업자가 늘었고, 광산촌에는 토지를 잃고 떠돌아다니던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가 평안도민을 차별하고 상공업 활동을 통제하며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몰락 양반인 홍경래는 서얼 출신인 우군칙 등과 함께 신흥 상공업자, 영세 농민, 광산 노동자, 품팔이꾼, 노비 등 다양한 계층을 모아 평안도 가산에서 봉기하였다(1811). 이들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평안도민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며 선천, 정주 등 청천강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관군에 밀려 5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세도 정권과 지방 수령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일어난 농민 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관리들의 부정과 수탈이 계속되면서 사회 불안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가혹한 수탈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소청 운동을 주도하고 몰락한 양반들도 이에 합세하였다. 농민들이 수령이나 지주, 고리대금업자들을 공격하면서 전국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1862년에는 진주에서 몰락 양반 유계춘을 중심으로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진주성을 점령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조세 대장을 없애고, 아전과 양반 지주의 집을 불태웠다. 이후 삼남 지방의 70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곧이어 북쪽의 함흥 지역에서부터 남쪽의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봉기가 전국적으로 퍼지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임술 농민 봉기 이후에도 사회 문제는 여전하였고, 농민들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농민 봉기를 계기로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한층 성장하였고 양반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는 점차 무너져 갔다.

안핵사

조선 후기에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하던 임시 벼슬이다

삼정이정청

18625, 박규수가 진주 농민 봉기를 조사하고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삼정 개선을 건의하자 정부가 설치한 임시 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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