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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확립하다.

by 변교수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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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양반 신분제 사회와 상품 화폐 경제

16세기 무렵의 양반들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여 정치적인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국역 면제 등의 특혜를 받아 일반 국민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우대되었으며 이러한 특권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강화하며,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렸다.

 

1.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확립하다.

조선 시대의 승경도놀이는 관직 이름을 적은 놀이판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보드게임이었다. 윷 등을 던져 누가 먼저 높은 관직에 올랐다가 최종점을 빠져나가는지를 겨루었고 주로 양반가의 아이들이 즐겼다. 양반가에서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관직 체계를 익힐 수 있도록 이 놀이를 장려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 신분 질서와 특징

조선 시대에는 양천제를 법제화하여 사회 구성원을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인 양반이 점차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지고, 양반 관료를 보좌하던 기술관과 향리 등이 별도의 신분 계층인 중인으로 자리 잡았다. 양반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피지배층인 상민과 양반을 엄격히 구분하는 반상제가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의 신분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층으로 정착되었다.

양반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국역을 면제받는 등 정치적 특권을 누렸다. 경제적으로는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과전과 녹봉을 받아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 중인은 관청의 서리와 향리 등 하급 관리와 역관, 의원 등을 일컬었다. 이들은 기술이나 행정 실무 능력의 전문성으로 직역이 세습되었으며, 같은 신분끼리 혼인하였다. 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중인과 같은 신분으로 대우를 받았다.

상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해당한다. 상민의 대부분은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의 부담을 졌다. 이들은 법제상 과거를 볼 수 있었지만 실제로 과거를 보기는 쉽지 않았다. 수공업자는 대부분 관청에 소속되어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고, 상인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 상거래 활동을 하였다.

한편, 양인 중에 수군, 역졸 등 천한 일을 담당하는 계층을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최하층 신분인 천민은 대부분이 노비였고 백정, 광대, 무당 등도 여기에 해당하였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 상속의 대상이 되었고,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일 경우 그 자녀도 노비가 되었다.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가 있었다. 사노비 중 외거 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생활하며 재산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소작하는 일반 농민과 처지가 비슷하였다.

 

조선의 신분제

양반

하늘이 백성을 낳았는데 ...... 그중 가장 귀한 것이 선비이다. 양반이라고 하며 그 이익도 막대하다. 농사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으며, 문사(文史)를 대강 섭렵하면 크게는 문과에 급제하고 작게는 진사가 된다. - 박지원, 양반전

중인

오래도록 막혀 있으면 반드시 터놓아야 하고, 원한이 쌓이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다. 중인, 서얼의 벼슬길이 막힌 일은 우리나라의 편벽된 일로 원통하고 답답함을 품은 지 이에 몇백 년이 되었다. - 규사

상민

() () 상고(商賈)도 모두 국민이지만 농가의 괴로움은 더욱 심한데도 오히려 10분에 1로 세()를 내는데, 공인과 상인은 일찍이 세가 없었다. 비록 10분의 1을 세로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30분의 1을 세로 받도록 허용하여 ....... - 태종실록, 1415.3. 8.

천민

노비의 매매는 관청에 신고하여야 한다. 사사로이 몰래 매매하였을 때는 관청에서 그 노비와 대가로 받은 물건을 모두 몰수한다. 나이 16세 이상 50세 이하는 가격이 저화 4천 장이고, 15세 이하 51세 이상은 3천 장 이상이다. - 경국대전, 형전

 

양반 중심의 향촌 지배 체제 확립

15세기 중반 이후 지방에서는 유력 양반(사족)이 중심이 되어 향촌 사회를 운영하였다. 사족들은 유향소를 만들어 수령을 보좌하고, 백성을 교화하였다. 이들은 향회를 열어 결속력을 다지면서 향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부는 유향소를 활용해 향촌의 자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한성에 경재소를 설치하여 유향소를 통제하였다.

16세기에 들어 사림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해지자 각 지방에 서원이 많이 세워지고 향약이 보급되었다. 사족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적 기반을 마련해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또한, 향촌 주민의 자치 규약인 향약을 운영하여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농민을 교화하였다. 서원과 향약의 확대로 향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산림이 형성되었고 사족에 의한 향촌 지배 체제가 더욱 견고해졌다. 한편, 사족들은 집안에 가묘를 세워 제사 지내고, 족보를 편찬하였다. 이들은 주자가례의 보급에 힘써 향촌에 성리학적 윤리를 확산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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