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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양난 이후 정치 운영이 변화하다.

by 변교수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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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양난 이후 정치 운영이 변화하다.

조선의 효종과 효종비가 죽은 후 효종의 계모인 자의 대비 조씨의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은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는 효종의 정통성 문제와 연결되었다. 서인은 왕실도 사대부와 같이 주자가례에 따를 것을 주장했지만, 남인은 왕실과 사대부의 예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정치 운영의 변화와 통치 체제의 개편

양난 이후 정치 운영의 변화가 나타나 중앙 정치에서는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비변사는 왜구와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임시회의 기구였으나 양난을 거치며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 재정, 인사 등 모든 업무를 총괄하였다. 이에 따라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가 유명무실해졌고, 왕권도 약화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부는 군제를 개편하여 훈련도감을 새롭게 설치하였다. 이후 17세기 말까지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추가로 설치되면서 5군영의 중앙군 체제를 갖추었다. 지방군에는 양반부터 노비까지 포함된 속오군을 편성하였다. 한편, 정부는 농촌의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대를 위해 수취 체제를 개편하였다. 광해군 때 대동법을 처음 실행하여 집마다 토산물로 부과하던 공납을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쌀, 무명이나 베, 동전 등으로 거두었다. 인조 때에는 풍흉과 관계없이 토지 1결당 쌀 4~6두를 전세로 거두는 영정법을 시행하였고, 영조 때에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농민의 군포 부담을 줄여 주었다.

 

붕당 정치의 변질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은 광해군과 함께 제도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서인이 주도하는 가운데 일부 남인이 참여하는 형태로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붕당 간 공존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현종 때 궁중 의례인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두 차례 예송이 일어나면서 붕당 간 대립이 치열해졌다.

이어 숙종 때에는 국왕의 주도로 집권 붕당이 급격히 교체되면서 정국이 바뀌는 환국이 나타났다.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여 상대 붕당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이러하듯 붕당 정치가 변질하면서 상대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나타났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숙종은 탕평책을 제기하였으나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영조의 탕평책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 정치가 불안해지자 영조는 국왕이 중심에 서서 정치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탕평파를 육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고, 붕당의 뿌리를 없애기 위해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붕당의 기반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고, 3사의 관리를 추천하는 관행을 없애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했다. 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덜어주었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였다. 속대전, 동국문헌비고등도 편찬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정조의 개혁 정치

영조 통치 후반에 외척의 힘이 강해지자 정조는 외척 세력을 억누르고 붕당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하였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정책을 뒷받침하는 기구로 삼았고,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개혁 세력을 육성하였다. 또한,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고,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여 개혁 정치의 중심지로 삼고자 하였다. 한편, 정조는 상업 발달과 민생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하여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였다. 서얼 출신 학자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였으며, 문화 발전과 학문 장려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법령을 정비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어떤 도시로 만들려 하였을까?

정조는 농업 도시, 상업 도시, 군사 도시의 기능을 갖춘 화성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화성을 개혁 정치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정조는 가뭄이 와도 모내기를 할 수 있도록 화성에 만석거라는 대규모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교통의 요지인 수원의 이점을 활용하여 시장을 열고 상인을 유치하였다. 또한, 장용영을 배치하였고, 도시 주변에 성곽을 쌓아 군사 방어 기능을 갖추었다. 화성을 쌓을 때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와 녹로 등의 기구를 이용하여 축성 기간을 단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성의 축성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1801화성성역의궤를 발간하였다. 수원 화성은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도 정치의 전개

영조와 정조 대의 탕평책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추진되어 정치 권력이 왕과 소수의 정치 집단에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일부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났다. 세도 정치는 순조, 헌종, 철종의 360여 년 동안 이어졌고 이 시기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권력을 행사하였다. 세도 가문은 비변사를 비롯한 주요 관직을 독점하였고, 여러 군영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정권 유지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왕권이 크게 약화하였다.

이 시기 정치 기강이 크게 문란해져 과거제 운영과 관직 임명 과정에서도 비리가 나타났다. 과거 시험에서의 부정이 극심하였고, 관직을 뇌물로 파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산 관리들이 이를 보상받고자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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