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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열강의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다

by 변교수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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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항 이후 경제적 변화

서울 중구에는 대한 제국 때 지은 광통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청계천 광통교와 가까워 광통관이라 불렸고, 대한 천일 은행 남대문 지점으로 사용되었다. 대한 천일 은행은 한성의 유력 상인인 김두승, 김기영 등의 투자와 고종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대한 천일 은행은 당시 전환국에서 발행한 백동화를 고르게 유통하고자 노력하였고, 각 지방의 조세금을 예금으로 받아 상인과 기업에 빌려주었다.

 

1. 열강의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다

개항 이후 금은 대외 무역에서 주요한 결제 수단이었다. 평안도 운산 금광에는 금 매장량이 많았고, 미국은 이 금광의 채굴권을 확보하여 금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였다. 이미 이곳에서 광산을 개발하던 조선인 광산 주인과 노동자들은 강제로 쫓겨났고, 미국인 광산 관리인이 조선인 농민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개항과 일본 상인의 무역

조선은 강화도 조약 체결로 부산, 원산, 인천을 차례로 개항하였다. 이 지역에는 외국인과의 무역을 허용한 개항장이 형성되었고, 개항 초기의 무역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 외국 상인들은 항구 부두로부터 동서남북 각 직경 10(4km) 이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개항장의 외국 상인과 내륙의 조선 상인을 중개하는 개항장 객주가 등장하였다.

이 무렵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의 경제적 침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불법 행위를 일삼았지만, 강화도 조약에 명시된 영사 재판권을 이용하여 조선 관리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조일 수호 조규 부록이 체결되면서 일본 상인들은 일본 화폐를 사용하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일 무역 규칙으로 일본 상선은 선박의 크기에 따라 정해진 항세를 부과받았으며 일본 정부 소속의 선박은 항세를 면제받았다. 이후 수출입 물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받지 않았다.

일본 상인은 청일 전쟁 이전까지는 주로 영국산 면직물을 싸게 사서 조선에 들여와 비싼 가격에 팔았다. 그리고 조선의 쌀, , 소가죽, 금 등을 사들여 일본에 팔아 차익을 남겼다. 조선에서는 일본으로 쌀, 콩 등이 다량 수출되면서 국내 곡물 가격이 올라 많은 사람이 높은 물가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면제품은 가볍고 입기 편한 외국산 면제품이 들어오면서 점차 판매량이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조선 면방직 수공업은 타격을 입었다.

 

청 일본 상인의 상권 침탈

임오군란 이후 체결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에 따라 청 상인은 허가를 받으면 개항장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최혜국 대우 규정에 따라 다른 나라 상인들도 동일하게 보장받았다. 그러나 조선에서 활동하는 서양 상인의 수가 청 일본 상인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조선은 주로 청과 일본 상인의 경쟁 무대가 되었다.

청과 일본 상인들이 개항장을 근거지로 삼아 내륙 시장까지 진출하자, 중개 무역으로 성장하던 객주 등은 자본을 동원할 힘이 부족해져 쇠퇴해서 갔고, 서울의 시전 상인들도 상권을 크게 위협받았다.

청과 일본 상인은 본국의 지원을 받으며 상권을 넓혀 나갔다. 특히 청은 임오군란 이후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 우세한 자금력 등을 바탕으로 조선의 상권을 장악해 갔다. 그 결과 1890년대 초반에는 조선이 청과 일본에서 수입한 총액이 비슷해졌다. 그러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 상인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섬유 공업이 발달하였고, 일본 상인들은 일본산 면직물을 조선에 들여와 싸게 팔았다. 이에 따라 조선의 면방직 공업은 더욱 몰락해 갔다. 1890년대 들어 일본으로 쌀이 대량 수출되면서 쌀값이 크게 오르자 지주들은 쌀을 확보하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 소작지를 바꾸거나 소작료를 인상하는 등 소작인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였다. 또한, 많은 사람이 토지 구매에 나서면서 땅값이 크게 오르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조일 무역 규칙 이후의 무관세 규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개정된 조일 통상 장정(1883)을 체결하여 개항장에서 관세를 부과하고 곡물 수출의 금지 조항을 넣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1개월 전 통고라는 단서 조항이 있어 방곡령을 둘러싼 분쟁의 여지를 남겨 두었고, 일본의 요구로 최혜국 대우 규정도 포함되었다.

 

열강의 이권 침탈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조선의 이권 침탈에 열을 올렸다. 이들은 최혜국 대우 조항을 내세우며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삼림 채벌권과 해운, 어업, 전기 등의 이권을 가져갔다. 특히 열강은 침략과 자원 수탈의 수단이 되는 철도 부설권 획득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은 경인선, 프랑스는 경의선, 일본은 경부선의 부설권을 얻었다. 그러나 청일 전쟁 때부터 한국에서 철도 부설권을 노렸던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인수하여 철도를 완공하였다. 이후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경의선 부설권을 넘겨받아 경부선과 함께 러일 전쟁 중 군용 철도 명목으로 철도를 부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 농민의 토지를 싼값으로 수용하거나 한국 정부로부터 철도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았고, 한국인을 공사 현장에 강제로 동원하였다.

열강은 한국의 자원도 침탈하였다. 미국이 운산 금광 채굴권을 따내고 러시아, 독일, 영국 등이 광산 채굴권을 가져갔다. 러시아는 삼림 채벌권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가 가진 삼림 채벌권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열강의 이권 침탈로 생계를 위협받은 한국인들은 이에 항의하며 시설을 파괴하거나 기존 생업권 보장,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금융 지배와 토지 수탈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일본은 한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금융과 재정을 장악해 나갔다. 1차 한일 협약에 따라 재정 고문으로 한국에 파견된 메가타는 전환국을 폐쇄하였다. 이어 1905년에는 화폐 정리 사업을 추진하여 백동화5와 엽전 등을 일본 제일 은행에서 발행하는 새 화폐로 바꾸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제일 은행의 조선 지점이 사실상 한국의 중앙은행이 되었고, 백동화의 가치가 2분의 1 이하로 평가 절하되거나 교환이 거부되기도 하였다. 화폐 정리 사업의 결과 한국의 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대한 제국은 화폐 정리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 차관으로 조달하여 거액의 국채를 떠안게 되었다.

일본은 통감부를 통해 전국에 재무서와 재무 감독국을 설치하고 징세 업무를 맡게 하여 정부 재정을 장악하였다. 황실 재정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역에 딸린 토지의 소작료와 홍삼 전매 수입도 국유화하여 정부 재정으로 통합하였다.

한편, 일본인들은 상권이 개항장 밖으로 확대되면서 고리대금 등의 방법으로 한국의 토지를 사들였다. 외국인이 허가 없이 토지를 매매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군산 나주 등 곡창 지대에 대규모 토지를 사들이어 농장을 경영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배후에서 권장하고 일본인의 이주를 돕기 위해 이민법을 개정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에는 철도 부지와 군용지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의 토지를 수탈하였으며, 1908년에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세워 국유화한 황실 소유의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싼값에 판매하였다.

 

화폐 정리 사업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일본은 백동화를 갑종, 을종, 병종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갑종은 형체와 모양이 양호한 백동화로 감정되어 당시 시세인 25푼으로 평가되었고, 을종은 질이 좀 더 낮은 백동화로 1전에 매수되었습니다. 그러나 질이 더욱 나쁜 병종 백동화는 일본 상인들에 의해 매수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병종 백동화를 보유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재산상의 손해를 입었는데, 반면 일본 상인들은 이와 관련된 정보를 사전에 알고 대비하여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 후 1909년에는 탁지부 대신 명의로 "구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를 발표하여 1910년부터는 백동화의 사용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개항 이후의 경제적 변화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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