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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1.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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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양한 민족운동의 전개

안창호는 많은 국가와 도시를 다니며 국외 동포들 앞에서 연설하고, 독립 자금을 모으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국외에 가기 위해 대한 제국 외부(오늘날의 외교부)와 중국 외교부 등에서 여권을 발급받았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외교부 상하이 지점에서 중국 국적으로 여권을 발급받기도 하였다. 안창호가 발급받은 여권을 보면, 그가 세계 각국에서 펼친 독립운동의 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 삼천리 이 천만의 우리 동포를 / 건질 이 너와 나로다 ...... 독립문의 자유 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이 노래는 1910년대부터 독립군이 불렀던 군가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드러나 있다. 만주 일대의 독립군은 계속된 탄압에도 독립 전쟁을 전개하며 일제에 맞섰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1910년대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들은 자치 단체를 만들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3·1 운동 이후 무장 독립 전쟁의 중요성이 확산되는 가운데 각 지역의 독립군들은 국내 진격을 목적으로 한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국경 지역을 수십 차례 공격하여 압록강 연안의 혜산진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독립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이자 일제는 병력을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 도독부군,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봉오동 전투, 1920).

이에 일본군은 만주 군벌과 협상을 맺고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 등은 이러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백두산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는 일본군이 만주에 진출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이들에게 훈춘 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하였다(훈춘 사건). 일제는 이 사건을 독립군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만주 지역으로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북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청산리 부근으로 집결하여 일본군과 일전을 계획하고, 전투에 유리한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그 결과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으며,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었다(청산리 대첩, 1920). 이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내 민족 운동이 활발해졌다.

 

독립군의 시련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간도 지역의 한인 마을을 습격하여 가옥, 학교 등을 불태우고 우리 동포를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간도 참변). 이 사건은 192010월부터 1921년 봄까지 이어졌으며, 이 사건으로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비롯한 민간인이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청산리 대첩 이후 만주 지역의 각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계속되는 공세를 피하고, 일본군에 장기 항전을 펼치기 위해 북만주의 미산(밀산)에 모였다. 이들 대부분은 약소민족의 민족 운동을 지원하겠다는 러시아의 약속을 기대하고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전으로 혼란한 가운데 일부는 다시 만주로 돌아왔고, 일부는 헤이룽강 연안에 있는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또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유격 부대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지휘권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고, 러시아 적군이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강요하면서 수백 명의 독립군이 희생되었다(자유시 참변, 1921). 이 사건으로 독립군은 러시아 적군에 편입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일부만이 만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자 노력하였다.

 

만주 지역 동포의 시련, 간도 참변

많은 국외 이주 동포들이 만주 지역에 정착하여 곳곳에 한인 마을을 만들어 모여 살았고, 자금을 모아 독립군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을 전후한 시기에 만주 일대에 출병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간도 지역에 3개 사단을 보냈다. 일본군은 한국인을 잔인하게 총살하고 가옥, 학교, 교회 등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19201030일에는 용정촌 부근에 위치한 장암동으로 일본군이 침입하여 주민들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시신까지 불태웠다. 당시 룽징(용정)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캐나다인 선교사 마틴은 사건 다음날 장암리에 방문하였다가 이를 목격하였고, 간도 참변의 참혹한 광경을 기록하여 일제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였다.

 

남자라면 늙은이, 어린아이를 막론하고 끌어내어 죽이고, 못 다 죽으면 타오르는 집이나 짚더미에 던져 타 죽게 하였다.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였던 그들의 아내와 어머니들 가운데에는 땅바닥을 긁어 손톱이 뒤집힌 사람도 있었다. ...... 할머니와 며느리 둘이 잿더미 속에서 타다 남은 살덩이와 부서진 뼈를 줍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며 시체 하나를 끌어내어 흩어진 팔과 다리를 주워 모은 후 사진을 찍었다. 어찌나 분통하였던지 사진기를 고정시킬 수 없어 네 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 조지훈, 한국 민족 운동사

 

독립군의 재정비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은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흩어진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3부가 성립되었다. 참의부는 압록강 건너 지안(집안)을 중심으로 동포 사회를 관할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소속의 군정부이고, 정의부는 하얼빈 남쪽 아래에 있는 남만주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러시아에서 돌아온 독립군이 중심이 되어 간도와 북만주 일대에서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3부는 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에서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면서 독립 전쟁을 수행하였고,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행정 입법 사법 조직을 구성하고, 동포들이 내는 세금으로 조직과 군대를 운영한 일종의 공화주의 자치 정부였다.

 

민족 유일당 운동과 3부 통합

독립군의 정비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25년 만주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맺어 독립군을 찾아내려 하였다. 일본군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포들의 지원까지 줄어들면서 독립군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었는데, 이는 국민대표 회의의 결렬 이후 침체에 빠져 있던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던 중 1920년대 후반 중국 관내와 만주에서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만주에서도 3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통합을 둘러싼 갈등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는 못하고, 3부는 국민부와 혁신 의회로 각각 재편되었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계속하였다. 북만주에서는 혁신 의회가 해체된 이후 지청천 등이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였고, 만주 사변 이후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여 일제에 맞섰다.

 

미쓰야 협정(1925)

1. 한국인이 무기를 가지고 다니거나 한국으로 침입하는 것을 엄금하며 위반자는 검거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2. 만주에 있는 한인 단체를 해산하고 무장을 해제하며, 무기와 탄약을 몰수한다.

3. 일본이 지명하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만주 봉천 군벌 경무처장 우진이 맺은 협정이다. 이 협정의 체결로 만주의 중국 관리들이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일본에 넘겨주면 포상금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 관리들이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 농민도 피해를 입었고,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중국 관리의 탄압도 피해야 하였다.

 

의열 투쟁의 전개

3·1 운동 이후 일제 고위 관리를 처단하거나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민중 혁명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려는 의열 단체가 만들어졌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김원봉의 주도로 결성된 의열단은 본부를 베이징으로 옮긴 뒤 조선 총독, 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의 식민 지배 기관을 파괴하려 하였다. 김원봉의 요청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에는 폭력 투쟁을 통한 민중의 직접 혁명을 추구하는 의열단의 기본 정신이 나타나 있다. 김익상, 김상옥 등 의열단원들은 이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고, 이들의 의거 활동은 동포들에게 항일 의식과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김원봉을 비롯한 단원들은 중국의 황푸 군관 학교에 입교하여 정규 군사 교육을 받는 한편, 1930년대에는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해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을 주도하였다.

의열단의 활동 외에도 의열 투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강우규는 조선 총독 사이토를 저격하였고, 조명하는 타이완에서 일본 왕족을 죽이는 의거를 일으켰다.

 

조선 혁명 선언과 의열단

우리는 외교론, 준비론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내쫓을 방법이 없는 바이다.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으로 가서 민중과 손을 맞잡아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제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의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신채호, 조선 혁명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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