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2. 독립을 위해 실력 양성에 힘쓰다

by 변교수 2023. 6. 24.
반응형

2. 독립을 위해 실력 양성에 힘쓰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주인공들이 일제의 탄압에도 농촌 계몽의 의지를 다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들이 농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데, 그 모습을 ‘<> 자에 ᄀ 하면 <> 하고, <> 자에 ᄂ 하면 <> 하면서 아이들은 제비 주둥이 같은 입을 일제히 벌렸다 오므렸다 한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희망이 나타나 있다.

독립을 위해 실력 양성에 힘쓰다

 

물산 장려 운동

3·1 운동 이후 일부 지식인들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언론을 통한 국민 계몽과 문맹 퇴치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들어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가 철폐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인 자본가들의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고, 1923년 서울에서도 조선 물산 장려회가 만들어지는 등 물산 장려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물산 장려 운동은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민족 산업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금주, 금연 등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은 한때 민중의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고,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 성과가 기업의 생산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상품 가격만 올려놓는 경우가 많아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은 점차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조선 물산 장려가 (2~3)

조선의 동무들아 이천만민아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나아오너라 우리 것 우리 힘 우리 재조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조선의 동무들과 이천만민아 자작자급 정신을 잊지를 말고네 힘껏 벌어라 이천만민아 거기에 조선이 빛나리로다 거기에 조선이 빛나리로다

 

 

물산 장려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물산 장려회는 두루마기 등 국산품 사용을 강조하였고, 일부 지방에서 토산품 애용 장려를 위한 거리 행진을 하였다. 점차 국산품 소비가 늘어 무명, 광목을 만드는 공장과 이를 판매하는 상인들이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한국 자본은 대중의 수요를 감당할 만한 생산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고, 일부 자본가와 상인들이 상품 가격을 올려 이익을 취하였다.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세상에 제일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을 오늘에야 우리는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여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 - 조선 물산 장려회 궐기문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일제가 국권 침탈 후 한국인에게 기초적인 교육의 기회만 제공하자, 일부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민족의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을 담당할 대학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만들어졌다(1922). 이를 바탕으로 출범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국내를 비롯하여 간도와 하와이 등지에서도 전개되었다.

이러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초기에는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계속되는 방해와 탄압, 잇따른 가뭄과 수해 등으로 모금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한편, 일제는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세워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고등 교육 수요를 충족하고, 한국인의 고등 교육에 대한 열기와 불만을 잠재우려고 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2차 교육령(1922)에 따라 보통학교가 증설되고 대학 설립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고등 교육에 대한 대책은 거의 마련되지 않았고, 한국인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려면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다. 그래서 대학을 세우고자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문맹 퇴치 운동

1920년대 후반에는 언론 기관이 중심이 되어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농촌 계몽 운동의 하나로,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한글을 보급하는 활동이었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여름 방학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생들과 함께 문자 보급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한글 교재를 발간하여 농촌에 배부하였고, 문맹 퇴치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학생 계몽대를 만들어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하였다. 각 지방의 마을마다 야학을 만들어 한글을 가르쳤고,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절약 등을 강조하며 계몽 활동도 펼쳤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브나로드 운동이 민족운동을 고취할 조짐이 보이자,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준다는 이유를 구실 삼아 이를 강제로 중지시켰다(1935).

 

실력 양성 운동의 의의와 한계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등으로 전개된 실력 양성 운동은 민족 경제의 자립과 근대 교육의 보급, 전근대적인 의식과 관습의 타파, 신문화의 건설 등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선진 문명사회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력 양성 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대적 발전을 추구하고, 민족의 실력을 키워 민족 독립의 토대를 마련하려 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쉽게 무너지는 경향을 보였고, ‘선 실력 양성, 후 독립을 내세웠지만, 점차 실력 양성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자치 운동과 참정권 운동의 대두

실력 양성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일부 민족주의 계열의 지식인, 지주, 자본가들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정치적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광수, 최린, 김성수 등은 일제의 이른바 문화 통치에 기대를 걸면서 조선 총독부 아래에 자치 정부나 자치 의회를 만들게 해 달라는 자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크게 비판하였다. 또한 일제가 3·1 운동 이후 일부 한국인들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일본 의회에 한국인 대표를 참여시키려는 참정권 운동도 일어났다.

이처럼 일제와 타협하여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얻으려는 움직임은 193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 운동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민족주의 세력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에 이용당하였다.

 

이광수의민족적 경륜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 지금까지 해 온 정치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동아일보, 1924. 1. 3.

 

경제 자립과 교육 구국을 내세운 실력 양성 운동

◼ 『산업계, 1923. 11.

우리가 우리의 손에 산업의 권리 생활 제일 조건을 장악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생명, 인격,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견지에 서서 우리 조선 사람의 물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첫째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사 쓰고, 둘째 조선 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하기를 목적하노라.

 

동아일보, 1923. 3. 30.

대학을 세워 고등 교육을 실시하자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와 같은 일이 모두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한 일이 되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다. ......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도다. -

 

조선일보, 1934. 6. 10.

오늘날 한국인에게 무엇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을 들자면 지식 보급일 것이다. 지식이 없이는 산업이나 건강, 도덕이 발달할 수 없다. 전 인구의 대부분이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취학 연령 아동의 10분의 3만이 학교에 가는 조선의 현실에서 간결하고 쉬운 문자의 보급은 민족이 가질 최대의 긴급한 일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