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2. 삼일 운동을 전개하다

by 변교수 2023. 6. 18.
반응형

2. 삼일 운동을 전개하다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던 유관순은 19193월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인 병천(현재의 천안시)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헌병에게 체포된 유관순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3·1 운동을 전개하다

 

삼일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 국내에서도 독립 선언의 움직임이 일었다. 19191,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지도자들과 학생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 인사들은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하고,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고, 대중적인 비폭력 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군중이 많이 모이는 고종의 국장일을 즈음하여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독립 선언서를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서울과 지방의 여러 도시에 몰래 배포하였다.

 

191931, 민족 대표들은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경성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후, 거리에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대규모의 시민이 가세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보여 주었다.

 

비슷한 시간에 평양, 의주, 원산 등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도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하려 하였으나, 만세 시위는 계속되었다.

 

기미 독립 선언서(1919)

오등(吾等)은 이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금일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 보성사본

 

만세 시위의 발전과 일제의 탄압

만세 시위는 전국의 주요 도시로 빠르게 확산되었다시위는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인 등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학생들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거나 동맹 휴학을 이끌었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며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상인들은 일제히 가게 문을 닫아 만세 시위를 지지하였다.

 

3월 중순을 지나면서 만세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농촌에서는 주로 장날에 장터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무단 통치 아래 일제의 민족적 차별과 각종 부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유생과 마을 이장이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당황한 일제는 경찰, 군대, 소방대를 동원하여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시위 주동자나 참여한 사람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이에 따라 평화적 만세 시위는 점차 적극적인 무력 투쟁의 양상으로 변하였다. 농민들은 돌멩이와 농기구 따위로 무장하여 경찰서, 헌병 주재소, 면사무소 등 식민지 통치 기관을 공격하였고, 일본인 지주나 고리대금업자 등을 응징하였다. 이처럼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화성 제암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3·1 운동은 국외의 한인 사회로도 확산하였다. 서간도의 삼원보,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이어졌고,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는 미주 지역 동포가 한인 자유 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는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제암리 학살의 현장을 가다

만세 시위가 일어났던 경기 화성 제암리와 고주리에서는 1919415일에 일본군이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스코필드가 참혹한 학살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담아 미국 언론에 보내면서 일제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졌다. 광복 이후 제암리 입구에는 일제에 학살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순국 기념탑이 세워졌고, 1982년에는 제암리 학살 현장의 유골 발굴과 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된 유골은 제암리에 마련된 합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들(선교사들과 외교관)은 이야기로 전해 들은 것보다도 훨씬 더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제암리) 교회는 재만 남았고, 그 근처에는 숯처럼 까맣게 타 버린 시체뿐이었으며, 타 들어간 시체 냄새로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다. 곡식 창고와 가축들도 같이 타 버렸다. 일본군이 각 가정을 방문하여 남자들을 모두 (제암리) 교회로 모이게 한 뒤, 교회에 붙을 질러 이들을 불에 타 죽게 하였다. 누군가가 교회를 빠져나와 도망치려고 하면 총으로 쏴서 죽였다. - 노블, 노블 일지 (1892 ~1934)5

 

3 1 운동의 의의

3 1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신분, 직업, 종교 등의 구별 없이 모든 계층이 참여한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또한 3 1 운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어, 일제는 폭력적인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3 1 운동 이후 민족 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끌 통일된 지도부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에 공화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무장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와 농민, 청년, 여성들은 민족 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고, 이후 각종 단체를 만들어 다양한 민족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3 1 운동은 중국의 5 4 운동 등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