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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3. 민족 유일당 운동을 추진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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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족 유일당 운동을 추진하다

신간회는 1927년 경성에서 자치 운동 움직임에 반대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국내의 대표적인 민족 협동 전선이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합법적 사회 운동 단체였다.

민족 유일당 운동을 추진하다

 

사회주의의 유입과 확산

3·1 운동 이후 일본, 만주, 연해주 등지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사회주의 사상은 청년,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결과 농민, 노동자 단체들을 비롯해 많은 사회주의 단체가 만들어졌고, 각 단체 대표들이 모여 1925년에 조선 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은 사유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였고, 농민과 노동자를 단결하여 일제를 타도하려 하였다. 이에 일제는 1925년에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조선 공산당은 1928년 말까지 국내에서 각종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민족 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창립

민족운동 전선의 통일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을 무렵,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가에 영향을 주어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 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중국 베이징에서는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결성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최린, 이광수 등이 자치 운동을 전개하며 일제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였고, 나아가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여 민족운동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일부 사회주의자와 함께 조선 민흥회를 만들었다(1926).

곧이어 사회주의자들은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력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합법 단체인 신간회는 경성에 본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지에 지회를 두었으며, 140여 개의 지회와 4만여 명에 이르는 회원을 보유한 대중적 정치 사회단체로 성장하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지회를 두어 활동하였고, 여성 단체들도 사회주의 계열과 기독교 계열 중심으로 통합을 이루어 근우회를 결성하였다.

 

신간회 활동

신간회는 합법적인 공간을 활용하여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식민지 교육 반대, 타협적 정치 운동 반대 등을 주장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을 비판하였다. 또한, 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을 다니며 민중을 계몽하였으며,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여성 운동 형평 운동 등 사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신간회는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고, 갑산군 화전민 사건2 등에 개입하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지방의 신간회 지회는 청년 단체나 농민 조합은 물론 신문사 지국과 함께 지역의 여러 사회 운동 단체와 연대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민족의 이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192911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광주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의 학생 운동 탄압에 항의하였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열어 이를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신간회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민중 대회는 열리지 못하였다.

 

갑산군 화전민 사건(1929)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증가한 화전민들이 함경남도 갑산 일대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이들은 산림 보호를 구실로 화전민을 추방하려는 일제에 저항하였다.

 

신간회 해소

민중 대회 사건 이후 새로 구성된 신간회 집행부는 기회주의를 부인한다는 신간회의 강령과는 다르게 일제와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온건한 방향으로 활동을 전환하려 하였다. 심지어 타협적 합법 운동을 강조하자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대공황 이후 노동자와 농민의 쟁의가 격렬해지자 사회주의자들과 코민테른은 계급 투쟁을 강조하였다.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 계열과의 협동 전선 해체를 지시하였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에 영향을 받은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협동 전선을 비판하였다. 또한, 이들은 신간회가 혁명 운동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해소를 주장하였다. 신간회의 해소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신간회 해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1931년 열린 전체 대회에서 신간회를 해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 사회주의 계열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 조합을 만들어 반제국주의 항일 투쟁에 집중하였고,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은 조선학 운동 등 문화 학술 활동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신간회는 대중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은, 국내에서 조직된 최대의 항일 운동 단체였다. 신간회의 결성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여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신간회 해소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의 해소를 주장하였는데, ‘해체가 한 단체나 조직을 단순히 해산하는 것이라면 해소는 한 단체의 해산이 아니라 다른 운동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민족 유일당 운동

조선일보, 1926. 11. 17.

정우회 선언-

우리의 승리로의 구체적 전진을 위하여 ...... 민족주의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과정적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히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하는 형태로 출현되지 않는 것에 한하여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개량적 이익을 위하여서도 종래의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분연히 싸워야 할 것이다.

 

대중신문 제9, 1928. 1. 1.

신간회 동경 지회 제2회 대회(1927. 12.) 정책안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최저 임금, 최저 봉급제의 실시

여자의 법률상 및 사회상의 차별 철폐

조선 민족을 억압하는 일제 법령의 철폐형평 사원 및 노복에 대한 일체 차별 반대

일체 학교 교육의 조선인 본위

 

◼ 『비판, 193178월 합호 내용 재구성

신간회 해소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소시민(봉급생활자, 자영업자 등)의 개량주의적 정치 집단으로 변질한 현재의 신간회는 무산 계급의 투쟁욕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다. 노동자 투쟁과 농민 투쟁을 강력하게 펼치기 위해서는 신간회를 해소하고 노동자는 노동조합으로, 농민은 농민 조합으로 돌아가야 한다. - 삼천리, 19314월호 내용 재구성조선인의 대중적 운동의 목표는 정면의 일정한 세력을 향해 집중되어야 한다. 민족 운동과 계급 운동은 동지적 협동으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요, 전체적으로 협동하여 진행하기보다도 그 자체 내 상호의 영도권이 다르므로, 역량의 분산 및 자기 마모의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

 

독립운동의 다양한 노선

3 1 운동 이후 민족 운동은 방법론적으로 무장 투쟁, 의열 투쟁, 외교 독립, 실력 양성 등 다양한 노선으로 나뉘었다.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독립을 목표로 하였다.

 

무장 투쟁으로 일제에 맞서자

일제에 맞서 독립 전쟁을 전개하여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외교 활동이나 평화적인 만세 시위 등의 방법만으로는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독립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동휘는 최후 혈전이라야 반드시 영원한 독립을 성공하리라 믿는다.”라고 하였다.

 

의열 투쟁으로 일제에 충격을 주자

일제의 식민 통치 주요 기관을 파괴하거나 조선 총독, 고위 관료 등 주요 인물을 암살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의열 투쟁을 통해 일제에 큰 충격과 공포를 주면 일제가 식민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 보았다. 김원봉은 조선 총독을 대대로 죽이면 그 뒤를 이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한국에 대한 통치를 스스로 포기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루자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가운데, 외교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임시 정부는 미국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 업무를 맡겼다. 또한, 한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거나 열강과의 외교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는 데 주력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국민이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였다.

 

민족의 실력을 키우자

교육과 산업의 발전을 통해 경제 문화 등의 분야에서 민족의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서양식 교육의 보급, 민족 자본의 성장, 전근대적인 의식 지양 등을 주장하였다. 안창호는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우리가 힘이 없어서였다. 그러하니 독립은 국민 개개인이 힘을 가질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 가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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