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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1-2. 광복 후 정부 수립 논의를 시작하다

by 변교수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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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광복 후 정부 수립 논의를 시작하다

광복 이후 국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입국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은 귀국 환영식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미 군정은 한국인이 만든 행정 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시 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으며, 인민 위원회도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광복 후 정부 수립 논의를 시작하다

 

8·15 광복과 국토 분단

1945815, 일본 국왕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은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국내 진공 작전 등과 같은 독립운동 세력의 노력이 무산되면서 자주적 정부 수립도 어려워졌다. 얄타 회담 이후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1945811일 한반도에 진주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며 한반도 북부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38도선을 기준으로 한 분할 점령을 소련에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따라 38도선 이북 지역은 소련군이, 이남 지역은 미군이 관리하게 되었다. 미국은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 지역을 직접 통치하였다. 미 군정청은 조선 인민 공화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 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조선 총독부에서 일하였던 관료와 경찰을 기용하는 등 기존의 행정 체제를 활용하였다. 한편, 소련은 각지에 세워진 인민 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하여 간접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였고, 사회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도록 지원하였다.

 

38도선, 민족의 분단선이 되기까지

소설 별을 헨다는 만주에서 살던 사람들이 광복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와서 정착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주인공의 가족 일행은 38도선을 땅 위에 가볍게 그어 놓은 선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다가 실질적인 분단선이 된 상황을 마주하였다. 본래 38도선은 전후 처리를 위해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 임시 경계선으로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 주민의 왕래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3년여간 미국과 소련의 직간접적 통치와 냉전 체제가 심화하는 상황 속에서 38도선은 민족의 분단선으로 고착되었다.

 

 인천에 와 닫고 보니 뜻도 않았던 삼팔선이 그어져 제 나라가 아닌 것처럼 남과 북이 제멋대로 굳었다. 그래도 내 땅이라 못 갈 리 없다고 삼팔의 경계선을 넘다가 빵 하고 산상에서 터져 나오는 총소리에 기겁을 하고 서성이다 보니 동행자 중 한 사람이 거꾸러졌다. 삼팔선의 국경 아닌 국경을 넘기란 이렇게도 모험인 것을 체험하고, 고향이래야 일가친척도 한 사람 없는 그리 푸진 고향도 아니다.

- 계용묵, 별을 헨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활동

일본의 항복 선언이 있기 전, 조선 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은 여운형은 광복 직후 안재홍 등과 함께 조선 건국 동맹을 중심으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조직하고 치안대를 설치하여 질서를 유지하였다. 이 무렵 좌익 세력이 위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일부 우익 세력이 이탈하였다. 미군이 9월에 한반도에 진주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미군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 조직을 정부 형태로 개편하고 각 지부도 인민 위원회로 바꾸어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한편, 송진우와 김성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 민주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지를 선언하였으며, 미 군정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조직하였고, 김구는 귀국 후 한국 독립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우리 민족의 반응

194512월에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 장관이 모스크바에 모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도 다루었는데, 민주주의 임시 정부의 수립과 이를 돕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실시 등이 결정되었다. 회의 결과가 국내에 알려지자 한국 독립당, 한국 민주당 등 우익 세력은 즉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공산당 등 좌익 세력도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이후 회의 결정의 본질이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에 있다고 보고,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태도를 바꾸었다. 좌익과 우익의 이러한 견해 차이는 좌우 대립을 심화하여 정치 세력 간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강령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함.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매일신보, 1945.9.

 

미소 공동 위원회의 개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을 두고 좌익과 우익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북한에서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출범하여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년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미소 공동 위원회와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에 관한 협의에 참여할 단체의 범위를 놓고 대립하였다. 소련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반대하는 세력은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미국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 사항인 신탁 통치안에 반대하더라도 참여를 원하는 모든 단체가 협의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의견 대립으로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고, 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미소 공동 위원회의 개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 사항(1945. 12.)

1.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라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 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해 ......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당한 방책을 도출하기 위해 남조선 미군 사령부 대표자와 북조선 소련군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 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3. 공동 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의 4개국 후견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해 미 영 소 중 정부의 공동 참작에 이바지하도록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1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6. 3.~ 5.)

미소 공동 위원회의 임무는 ...... 한국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한국 인민이 수립하도록 지원해 주는 일입니다. 장래의 한국 민주주의 임시 정부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모든 민주주의적 정당과 사회단체의 광범한 통일이라는 기초 위에 수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 소련 대표 시티코프 대장의 연설 내용

 

소련 대표단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반대하는모든 한국인들이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없도록 배제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미국 대표단은 그러한 배제 원칙이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권리를 한국인들로부터 박탈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습니다. ...... 남한의 절대다수는 (모스크바 결정의) 이 조항에 반대하는데, ...... 특정 지도 그룹이 지배하는 소수 남한 정당들이 돌연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바꿨습니다.

- 하지 중장이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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