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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2-1.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by 변교수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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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1948815, 중앙청 앞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과 광복 3주년 기념식을 경축하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행사장에서는 애국가 제창과 국기 게양이 이어졌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연단에 올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되었음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거리 양측에 늘어선 군중들은 기념식 실황 방송에 맞추어 만세를 불렀고, 행사가 끝난 뒤에는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시가 행렬에 박수를 보냈다.

2-1.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작대기 하나 아무개 후보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1948년 당시에는 문맹자가 많아 선거 홍보 포스터는 물론 투표용지에도 국회 의원 후보자 기호를 작대기로 표기하였다. 많은 후보자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호를 작대기 개수로 알리며 선거 유세를 다녔다. 이렇게 치러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 의원 선거는 전국적으로 95.5%라는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5·10 총선거 실시

미 군정은 유엔 소총회의 결정으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1948510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국민의 대표인 국회 의원이 지역별로 선출되었다. 5·10 총선거는 21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였고,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 원칙에 따라 치러진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였다. 그러나 김구, 김규식 등 남북 협상 참가 세력과 많은 중도계 인사가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좌익 세력인 남조선 노동당은 파업, 시위 등을 벌이며 선거 반대 투쟁을 벌였다. 5·10 총선거 결과 임기 2년의 제헌 국회 의원 198명이 선출되었다. 당시 제헌 국회의 정원은 300명이었으나, 100명은 통일 정부 수립을 염두에 두고 추후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선출하기로 하였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총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러질 수 없었다.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곳에서 정족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 처리되었고, 이듬해 다시 선거를 치렀다.

 

5·10 총선거 직후 정치 세력의 동향

5·10 총선거에서는 무소속이 85석으로 가장 많이 당선되었다. 그다음은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등 이승만 계열의 인물이 58석을 차지하였다. 한편, 미 군정청과 긴밀한 관계 속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던 한국 민주당은 29석밖에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등 자신의 지지 세력과 한국 민주당, 무소속 등을 모아 국회 의장에 당선되었다.

 

무소속 당선자 가운데에는 조봉암, 김약수 등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북 평화 통일을 지향한 이들은 다음 해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승만에 대한 강력한 원내 견제 세력으로 활동하였고, 친일파 처벌과 토지 개혁을 위한 법령 제정에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8717일 선포된 제헌 헌법은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임을 밝혔다. 또한, 삼권 분립과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였고 국회가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였으며, 평등과 공공복리를 강조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국회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하였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내각을 조직하고,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그해 12월에 열린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총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북한 정권의 수립

광복 직후 북한 지역에서는 정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평양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고, 국외에 있던 여러 정파의 사회주의 인사들이 국내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점령 기구를 설치하여 북한 지역을 통치하다가 점차 인민 위원회에 행정권을 넘겨주었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인민 위원회는 관공서와 생산 기관을 접수하고 치안을 유지하였다. 194512월에 조만식 등 우익 세력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반대하자, 소련군은 우익 세력을 축출하였다. 19462월에는 각 지방의 인민 위원회를 총괄하는 중앙 권력 기구로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출범하였고 여기에서 김일성이 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우선 19463월 무상 몰수 무상 분배 방식의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이어 노동법과 남녀평등권법을 시행하였다. 또한, 공장, 광산, 철도를 비롯한 중요 산업과 지하자원, 산림 등을 국유화하였다.

 

1947년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북조선 인민 위원회로 개편한 뒤, 1948년 초 조선 인민군을 창설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북한은 표면상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비판하며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으나,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자, 곧바로 최고 인민 회의를 구성할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1948. 8. 25.). 이를 바탕으로 제1차 최고 인민 회의를 개최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곧이어 내각을 구성한 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1948. 9. 9.). 이로써 남과 북에는 체제를 달리하는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38도선은 분단선이 되었고 남북 간의 대립과 갈등은 심화하였다.

 

광복 이후 북한으로 간 정치인들

홍명희는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여 조선 양반 계층의 위선을 비판하고, 권력에 대항하는 하층민의 활약상을 그렸다. 신간회 창립 당시 부회장을 맡으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 홍명희는 1948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 협상)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에 남았다. 이후 북한 정권의 수립에 기여하여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이 되었으며,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의열단과 조선 의용대를 지휘하며 일제 강점기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한 김원봉은 광복 직후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였다. 홍명희와 마찬가지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가 북한에 남았다. 19489월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김일성이 연안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함께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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