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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1-1. 냉전 체제가 형성되다

by 변교수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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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발전

냉전 체제 속에서 남에는 대한민국 정부, 북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우리나라는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루었다. 이후 높아진 국제 위상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원 활동을 벌이며 국제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편, 분단된 남과 북은 교류 협력하며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1.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2.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3. 6·25 전쟁과 남북 분단의 고착화
   4. 4·19 혁명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
   5. 경제 성장과 사회 문화의 변화
   6. 6월 민주 항쟁과 민주주의의 발전
   7. 외환 위기와 사회 경제적 변화
   8. 남북 화해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노력

 

1.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194599, 조선 총독부 청사 앞에서 미군은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렸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815일까지 약 3년간 한국은 미군의 통치를 받았다. 미 군정청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 및 경찰 조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남한을 통치하였다.

 

[한국사의 창] 1-1. 냉전 체제가 형성되다

1948년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독일의 관할 지역 내에서 화폐 개혁을 실시하자, 소련은 베를린으로 통하는 철도, 도로와 수로 등 연결 통로를 차단하며 베를린을 봉쇄하였다. 이에 맞서 미국과 영국 등은 비행기를 이용하여 베를린에 생필품을 공수하였다. 이듬해 베를린 봉쇄는 해제되었으나,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냉전 체제가 형성되다

 

전후 처리와 국제 연합의 탄생

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은 카이로, 얄타,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 패전 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가 관리하는 서독과 소련이 관리하는 동독으로 분리되었으며,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극동 위원회의 관리를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 뉘른베르크와 일본 도쿄에서는 전범 처리를 위한 군사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는 침략 전쟁을 범죄 행위로 간주하고, 전쟁 중 자행된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국제 사회는 전쟁을 방지하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국제 연합(UN)을 창설하였다(1945). 유엔은 회원국이 모두 참여하는 총회를 중심으로 여러 이사회와 산하 기구를 두었다. 또한, 안전 보장 이사회의 5개 상임 이사국이 안건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게 하여 한 국가의 독주를 견제하도록 하였고,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유엔군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냉전 체제가 형성되자 유엔의 평화 유지 노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냉전(Cold War)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직접적인 무력 사용보다는 정치, 외교, 군사 등에서 긴장 상태를 유지하였던 상황을 일컫는다. 열전(Hot War)과는 대조되는 개념이다.

 

국제 연합(UN) 헌장

42조 안전 보장 이사회는 규정된 조치가 불충분할 것으로 인정하거나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 또는 회복에 필요한 공군, 해군 또는 육군에 의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전쟁 범죄를 단죄하고자 열린 극동 국제 군사 재판

일본 도쿄에서는 일본 주요 전범을 처리하기 위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는 태평양 전쟁의 개전 과정과 일본이 자행한 각종 전쟁 범죄 행위가 밝혀졌다. 최종 판결에서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된 28명 중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는 금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재판에 참여한 국가 중 아시아 국가는 중국, 인도, 필리핀뿐이었으며, 아시아인의 피해는 재판의 중점 사안이 되지 못하였다. 또한,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일본 국왕을 비롯하여 전쟁에 협력한 관료와 재벌은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기소되지 않은 A급 전범들은 194812월에 전원 석방되었다.

 

냉전 체제의 형성

2차 세계 대전으로 전후 국제 질서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이 이념과 체제의 우위를 경쟁하는 냉전 체제가 형성되었다. 동유럽 지역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 정권이 수립되자, 미국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유럽 부흥 계획(마셜 플랜)을 수립하였다(1947). 그러자 소련은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 1947)과 공산권 경제 상호 원조 회의(COMECON, 1949)를 조직하여 이에 맞섰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계기로 독일이 분단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군사 동맹을 강화하고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1949)를 설립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WTO, 1955)를 설립하였다.

 

동아시아의 변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국공 내전). 4년 동안 이어진 내전은 결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마오쩌둥은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1949).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세력 확대는 한반도와 베트남에도 영향을 주어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일본을 반공 거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3 체결을 주도하여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키고 경제 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1951년 미국의 중재로 연합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대일전에 참가한 54개국이 회의에 초청되었지만, 한국과 중국 등 피해 당사국은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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