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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6-3. 건국을 준비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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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건국을 준비하다

19409,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에는 남성 대원뿐만 아니라 여성 대원도 있었다. 오광심, 조순옥, 김정숙, 지복영이 여성 대원으로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총사령부의 비서 업무와 선전 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건국을 준비하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의 역량 집중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통합 회의가 결렬된 이후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 3개 정당은 1940년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19409, 중국 국민당을 따라 충칭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또한, 이전의 집단 지도 체제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를 마련하고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정당(한국 독립당), 정부(임시 정부), 군대( 한국광복군)의 체제가 정비되고 인적 기반이 확대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위상과 역할은 커졌다.

 

민족주의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자,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임시 정부로의 통합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왔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임시 정부로 단일화할 것을 권고하였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적극적인 대일 항전을 위해 민족운동 세력의 결집이 요구되었다. 그러던 중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민족 혁명당이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임시 정부는 중국 관내 독립운동을 아우르는 통합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임시 정부는 화북 지역의 조선 독립 동맹과도 연대를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갑작스러운 패망으로 통합을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한국광복군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지청천을 사령관으로 한 한국광복군은 중국 국민당의 군사 원조를 받아 군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고,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 항에 의해 중국 군사 위원회의 간섭을 받았다. 1942년에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의 본부가 합류하여 전력을 강화하였고, 이로써 중국 관내의 한인 무장 부대는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되었다. 1944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광복군의 지휘권을 가지면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임시 정부의 위상이 높아졌다. 한국광복군은 주로 중국군 부대에 배치되어 비정규전에 참여하였다.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선전 활동, 한국인 학병을 독립군으로 유도하는 공작 활동, 일본군 포로를 심문하거나 문서를 번역하는 임무 등을 수행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식으로 일제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고, 한국광복군이 연합군과 합동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3년 한국광복군은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미얀마 인도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일본군 포로 심문, 문서 번역, 선전 활동 등을 담당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 힘으로 일제의 항복을 받아 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임시 정부는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협력하여 한국광복군 제2 지대와 제3 지대를 국내 투입 유격 요원으로 훈련에 참여시켰다. 훈련을 마친 요원을 중심으로 국내 정진군을 조직하여 1945820일에 국내 진공 작전을 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작전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작전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성명서(1941)

우리는 삼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 영국, 미국 및 기타 모든 나라의 대일 선전이 일본을 물리치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여 이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추축국에 선전한다.

3.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하여 최후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한국광복군 창립 소식에 많은 한국인 청년이 충칭에 찾아왔다. 김준엽과 장준하는 일본군 학도병이었다가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김준엽은 장정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한국광복군을 찾아가는 것이 6,000(2,400 )의 긴 여정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장준하는 한국광복군에서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의 합동 훈련을 받던 중 맞이한 광복과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돌베개에 기록하였다.

 

나는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 충칭으로 가는 6,000리 장정의 길에 나섰고 ......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어 시안에 있는 제2 지대로 찾아가서 OSS 특별 훈련을 받았다. 국내 지하 공작원으로 진입하려고 하던 때에 투항을 맞이하였다.

- 김준엽, 장정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 장준하, 돌베개

 

국외 건국 준비 활동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고, 이와 동시에 일제의 패망 이후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 임시 정부는 194111월에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여 일제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이후에 세우고자 하는 국가의 이념과 체제를 밝혔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한국 독립당의 이념이었던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기초하였으며, 민주 공화정의 수립,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 보통 선거의 실시, 무상 교육 실시 등의 내용을 담았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포괄하고 있어 여러 정치 세력의 통일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후 임시 정부는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개정 발표하여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삼권 분립 등의 내용을 명시하였다.

 

중국 화북 지방에서는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942년 조선 독립 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 독립 동맹도 일제의 패망을 대비하여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건국 강령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공화국 수립, 남녀평등권의 확립, 의무 교육 실시, 토지 분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의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군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기반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미주 지역 한국인 사회에서는 항일 운동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1941년 미주 지역 9개 단체를 통합하여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의연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였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국방 경비대5를 조직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임시 정부는 한인 국방 경비대를 승인하고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 인정하였다.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는 워싱턴에 외교 위원회를 설치하고, 미 국무부에 한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임시 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일제의 패망이 임박하자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은 통합과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중국 국민당 지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중국 공산당 지역인 옌안의 조선 독립 동맹,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소련 연해주로 철수한 한국인 부대, 국내에서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 건국 동맹 등 항일 운동 세력은 지역적 기반을 배경으로 활동하며 상호 연계와 통일 전선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면서 통합 논의는 중단되었다.

 

삼균주의

정치, 경제, 교육에서의 균등을 바탕으로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균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 건국 준비 활동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의 민족 지도자들은 1944년 비밀리에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일제 타도를 위한 대동단결,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민족주의자부터 사회주의자까지 포함한 비밀 결사였다.

조선 건국 동맹은 1년 정도 활동하면서 지방 조직으로 10개 도 조직을 만들었고, 그 아래에 노동자, 농민, 청년 등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특히 농민 동맹은 일제의 징용, 징병, 식량 공출, 군수 물자 수송 등을 방해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후방 교란과 무장봉기를 목적으로 하는 군사 위원회를 만들고, 국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 독립 동맹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의 연계를 모색하였다.

 

건국 강령에 담긴 새로운 나라의 모습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건국 강령(1941)

3장 건국

4. 보통 선거에는 만 18세 이상 남녀로 선거권을 행사하되 신앙, 교육, 거주 연수, 사회 출신, 재정 상황 등을 분별치 아니한다.

6. 대생산 기관의 공구와 시설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농림, 수리, 소택과 수상 육상 공중의 운수 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 농 공 상기업과 성시, 공업 구역의 공용적 주요 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및 중등 기업은 사영으로 한다.

 

조선 독립 동맹의 건국 강령(1942)

본 동맹은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전복하고 독립 자유의 조선 민주 공화국을 수립할 목적으로 다음 임무를 실현하기 위해 싸운다.

(1) 전 국민의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을 수립한다.

(6) 조선에 있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일체 자산 및 토지를 몰수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기업을 국영으로 귀속하며, 토지 분배를 실행한다.

 

조선 건국 동맹의 건국 강령(1944)

1.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 제국주의 모든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3. 건설 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정을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국제 사회의 한국 독립 약속

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기를 잡자 194311월 미국, 영국, 중국의 대표들은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상호 협력과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각국 대표들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최초로 논의하였다. 각국 대표들은 회담 후 대일전에 상호 협력하고, 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차지한 영토를 회수하며,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독일의 패전이 임박하자 19452월에 미국, 영국, 소련 등 3국 대표들은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이 독일을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을 비밀리에 결정하였다. 그 밖의 패전국이나 광복을 맞은 민족은 모든 민주 세력에 의해 임시 정부를 구성한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다.”라는 원칙을 마련하였다.

 

독일이 항복한 후 19457, 연합국들은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포츠담에 모였다. 포츠담 회담 기간에 미국, 영국, 중국 대표들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카이로 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 이후에도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자, 미국은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였다. 이에 일본은 8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카이로 선언(1943. 11.)

(미국, 영국, 중국) 3대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얄타 회담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이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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