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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3-2. 전후 독재 체제를 강화하다

by 변교수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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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후 독재 체제를 강화하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 보자.’, ‘갈지 못하면 살 수 없다.’ 등의 구호를 내세워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갈아 봤자 더 못산다.’, ‘구관이 명관이다.’, ‘나라 위한 한평생 합심하여 또 모시자.’ 등의 구호를 내걸고 민주당에 맞대응하였다. 주제

전후 독재 체제를 강화하다

 

반공주의와 독재

6·25 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앞세워 정권 연장에 힘썼다. 전쟁 직전 치러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1에서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대통령 간선제로는 다시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25월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폭력 조직을 동원해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을 협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발췌 개헌)을 통과시켰고, 이어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연임에 성공한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는 내용의 헌법을 고치려 하였다.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1954년 개헌 당시의 대통령에 한해서 연임 횟수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제출하였다가 1표 차로 부결되자, 이후 사사오입(반올림) 논리를 내세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개헌). 개정된 헌법에 따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편, 당시 무소속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이 예상보다 많이 득표하자 이승만 정부는 평화 통일론을 주장하였던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탄압하였다(진보당 사건2).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사회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을 폐간하는 등 언론을 억압하였다.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발췌 개헌은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52년에 이루어졌다. 개헌안은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 여당안과 내각 책임제를 중심으로 하는 야당안을 절충하여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지 않아 양원제 국회가 수립되지 않았다. 1954년 자유당이 제출한 사사오입 개헌안은 3선 금지 조항의 적용 배제,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의 대통령직 승계 제도 등을 담고 있었다. 당시 개헌 정족수는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 이상인 136명이었는데, 자유당은 203명의 3분의 2135.333 ...... 명이므로 135명이 개헌 정족수라고 주장하며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전후 복구와 생활의 변화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어 생활필수품이 부족해지고 실업자가 크게 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일제로부터 압류한 귀속 재산과 미국의 원조 물자를 민간 기업에 헐값으로 팔아 전후 복구 자금을 마련하였다. 미국의 원조 물자는 대개 밀, 사탕수수, 면화 등 소비재 산업의 원료에 집중되어 제분업, 제당업, 면방직 공업 등 이른바 삼백 산업이 발달하였다. 미국에서 대량의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식량 문제는 다소 해결되었지만, 국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여 농가 소득이 크게 줄었다. 또한,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1950년대 말부터 원조가 감소하고 무상 원조가 유상 차관으로 바뀌면서 한국 경제가 어려워졌다.

 

6·25 전쟁 중 피란민이 도시로 몰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인구의 도시 집중이 심화하였다.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날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갔고,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녀 교육4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 시기 초등 의무 교육의 실시와 공립 학교의 설립은 문맹률을 낮추는 데 기여하였다.

 

전쟁 중 많은 남성이 죽거나 다치면서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커졌다.

또한, 많은 사람이 이주하면서 촌락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다. 이 무렵 미국의 원조 과정에서 서양식 노래와 춤을 비롯한 미국식 대중문화가 유입되어 전통적인 가치관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북한의 사회주의 독재 체제 확립과 전후 복구

1948년 정부 수립 초기에 북한은 김일성의 갑산파, 김두봉의 연안파, 허가이의 소련파, 박헌영의 남조선 노동당파가 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6·25 전쟁 기간에 김일성은 박헌영 등 남조선 노동당 출신의 국내파는 물론 중국 및 소련과 가까운 연안파와 소련파의 주요 인물을 제거해 나가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1956년에는 연안파가 김일성의 권력 독점과 사회주의 건설 정책을 비판하며 권력을 장악하려 하자, 김일성은 이를 기회로 삼아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행하였다(8월 종파 사건). 이후 김일성 중심의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북한의 전후 복구는 북한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에 힘입어 추진되었다. 북한은 1954년부터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을 시작함에 따라 본격적인 복구 사업을 전개하였다. 1956년부터는 천리마운동을 벌여 노동력을 최대한 동원해 생산력을 높이고자 하였으며, 1957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초반에는 천리마운동이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지만, 점차 노동력 강제 동원이라는 한계점이 나타났다. 1958년에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 수단을 통합하고 투입한 노동량에 따라 수확물을 분배받는 농업 협동화를 전면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를 통해 북한에서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연안파 중국 옌안(연안)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하다가 광복 후 입북한 조선 독립 동맹 출신의 정치 집단을 일컫는다. 소련파 소련 내의 한인 출신들로, 광복 후 소련이 북한 통치를 위해 정책적으로 양성하여 귀국시킨 세력이다.

 

임시 수도 부산에서 전쟁의 흔적을 찾다

이승만 정부는 북한군의 공세를 피해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6·25 전쟁의 혼란을 수습해 나갔던 임시 수도 부산에 대해 살펴보자.

 

임시 수도 정부 청사

경남 도청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된 이후부터 1953년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정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서구식 르네상스 양식이 변형된 3층짜리 붉은 벽돌 기와 건물이며, 현재는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밀면전쟁

당시 북한 지역 출신의 피란민들은 냉면이 먹고 싶었지만,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구호물자인 밀가루에 감자 가루를 섞어 냉면 면발과 비슷하게 면을 뽑아 먹었다.

 

감천 문화 마을

전쟁 당시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산기슭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감천 마을도 이때 피란민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산자락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계단식 주거 형태와 미로와 같은 골목길 경관이 독특하다.

 

유엔(UN) 기념 공원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이다. 조성 당시에는 군대를 파견한 16개국과 의료 지원단을 보낸 5개국 11,000여 명의 전사자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본국 정부나 유가족의 요청에 따라 이장되어 현재는 11개국 2,300여 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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