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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3-1. 6·25 전쟁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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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25 전쟁과 남북 분단의 고착화

6·25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남겼다. 이러한 민족의 애환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등의 여러 노래에 담겼다. 굳세어라 금순아195012월 당시 흥남 부두의 철수 과정에서 헤어진 가족에 대한 애타는 심정을 나타냈으며,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전쟁을 피해 부산에서 임시로 거주하는 피란민의 심경을 표현하였다.

 

3-1. 6·25 전쟁이 일어나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가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드는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19508, 학도 의용군 이우근이 쓴 이 편지에는 전장 한가운데 있는 소년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6·25 전쟁 당시 수많은 청소년이 학도병, 학도 의용군 등으로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다

 

전쟁의 배경

남과 북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반도에서는 긴장과 대립이 고조되었다.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남한과 북한에 각각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남한 정부는 국방 경비대를 국군으로 확대, 개편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지리산 주변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를 토벌하고, 좌익 활동가를 색출하여 전향시켰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전차, 비행기 등 무기와 군사적 지원을 받았고, 중국의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 등을 인민군에 편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였으며, 중국도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한편, 미국은 남한에서 전투 부대를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1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소련과 중국의 지원 아래 전쟁을 준비하였다.

 

애치슨 선언

19501월에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과 오키나와 - 필리핀 군도로 이어지는 선으로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과 타이완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함을 의미하였다.

 

김일성과 스탈린, 비밀리에 만나다

1949년과 1950년에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위한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 특히 19503월 김일성과 스탈린의 비밀 회담이 있었는데, 당시 스탈린은 주한 미군 철수, 중국의 공산화, 소련의 원자 폭탄 실험 성공 등의 상황을 감안하여 지원을 약속하였다.

 

김일성: 마오쩌둥 동지는 중국 혁명만 완성되면 우리를 돕고, 필요할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겠습니다.

스탈린: 엘리트 공격 사단을 창설하고 추가 부대 창설을 서두르시오. 사단의 무기 보유를 늘리고 이동 전투 수단을 기계화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된 귀하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겠습니다. ...... 북측의 선제공격과 남측의 대응 공격이 있고 나서 전선을 확대할 기회가 생길 것이오.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 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국제국 보고서

 

전쟁의 전개 과정

1950625일 새벽, 북한은 기습적이고 전면적으로 남침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은 치밀하게 준비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7월 말에는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요청으로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평화에 대한 파괴 행위로 규정하고, 남한에 대한 군사 지원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남한에 파견되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하였다. 928일 다시 서울을 되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여세를 몰아 38도선을 돌파하여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고 압록강 유역까지 도달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쪽 국경에 이르자 중국은 10월부터 군대를 보내 북한을 지원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남하하였고, 이에 따라 19511월에는 서울이 다시 함락되었다(1·4 후퇴).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총공세를 감행하여 서울을 다시 찾았고, 38도선 부근에서 북한군, 중국군과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이어 갔다.

 

38도선 근처에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의 제의로 19517월부터 당사국들 사이에 정전이 모색되었다. 그러나 정전 협상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2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정전 협정 체결이 지연되는 동안 38도선 부근에서는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일방적으로 반공 포로를 석방하기도 하였다. 결국, 19537월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전쟁의 영향

6·25 전쟁은 남북한에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가져왔다. 군인과 민간인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많은 이산가족과 전쟁고아가 생겼다. 또한, 도로, 주택, 철도 등 사회 간접 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고, 피란민이 몰려든 곳에서는 심각한 식량 및 주택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 전선이 한반도 전역을 오르내리면서 상대편에 협조하였던 사람들을 처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지주와 자본가 및 군인과 경찰 가족들을 처형하고, 북으로 퇴각하면서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 등을 끌고 갔다. 또한, 국군과 경찰은 다수의 국민 보도 연맹원, 교도소 수감자 등을 처형하였다. 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적대감이 깊어져 분단은 굳어졌고, 아직도 이산가족 문제와 미송환 포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한편,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중국은 참전 후 사회주의권 내에서 정치적 위상이 커졌으며, 일본은 6·25 전쟁 특수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아시아의 반공 거점 국가로 자리 잡았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내용과 영향

본 조약의 당사국은 모든 국민과 모든 정부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희망을 재확인하며 ......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통의 결의를 공공연히 또는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1조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라도 국제적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고, 국제 관계에 있어서 유엔의 목적이나 당사국이 유엔에 대하여 부담한 의무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2조 당사국 가운데 어느 한 나라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 무력 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4조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락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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