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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4-1. 4·19 혁명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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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19 혁명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

4·19 혁명에 참여한 고등학생 이재영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들로 일기를 써 내려갔다. 일기에는 민주주의가 사망하는 날이라고 표현한 3·15 부정 선거부터 418일 고려대 학생 시위, 419일 경무대로의 진격 과정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4-1. 4·19 혁명이 일어나다

이승만 정부는 1960년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유례 없는 부정 선거를 벌였다. 투표소 안에서 표를 바꾸거나 개표 과정에서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하였고, 유권자의 표를 미리 기표해 두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총유권자의 수보다 투표자 수가 더 많이 나오자 공무원들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불태우는 일도 있었다.

4·19 혁명이 일어나다

 

4·19 혁명의 배경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미국의 경제 원조 감축에 따른 경기 침체 등으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3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승만은 단독 후보로서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80대의 고령인 이승만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겨 국정 운영이 어려워질 때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했기 때문에 자유당과 이승만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벌였다( 3·15 부정 선거). 국민은 선거 이전부터 자유당의 노골적 선거 개입에 항의하였고, 선거 당일에는 마산, 광주, 서울 등에서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열었다.

 

특히 마산에서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쳐 국회에서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얼마 뒤 마산 시위 과정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최루탄을 맞고 숨진 채 바다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정부는 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되었다고 발표하며 상황을 무마하려 하였지만, 국민의 반감은 더욱 고조되어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자유당의 부정 선거 지령

4할 사전 투표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기권표 등을 그 지역 유권자의 4할 정도씩 만들어 투표 시작 전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하여 투표함에 넣도록 할 것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를 미리 공작한 유권자들을 3인조 또는 5인조로 편성한 뒤 기표한 투표용지는 자유당 측 선거 위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넣도록 할 것

 

야당 참관인 축출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하여 투표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적절한 구실을 만들어 축출할 것

 

4·19 혁명의 전개

418일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 폭력배의 습격을 받아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소식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은 419일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서울의 시위대가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여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이승만 정부는 시위 확산을 막고자 전국 대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후 시위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425일 대학교수 200여 명이 시위대를 지지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이자, 여기에 힘을 얻은 시민들은 밤새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426일 이승만은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퇴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후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부패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

잊을 수 없는 419/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 총알은 날아오고 / 피는 길을 덮는데 / 외로이 남은 책가방 / 무겁기도 하더군요 /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 오빠와 언니들이 / 왜 피를 흘렸는지 - 수송초등학교 강명희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한성여자중학교 진영숙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지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중립적인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단되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사상의 자유 불빛은 무식한 전제 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 1960. 4. 19.

 

내각 책임제의 도입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과도 정부는 양원제 국회 구성과 내각 책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크게 승리하였고, 이후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에는 윤보선이, 국무총리에는 장면이 당선되었다(1960. 8.). 내각 책임제를 규정한 헌법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존재였으며, 정부를 운영하는 실질적인 권한은 국무총리가 행사하였다.

 

장면 정부는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와 경제 발전 등을 국정 과제로 제시하였다. 시장과 도지사는 물론 면장과 면 의원까지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원조 경제에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마련하고, 도로와 교량 건설 등 국토 건설 사업을 추진하였다.

 

4·19 혁명 이후 사회 각계각층에서 그동안 억압되었던 민주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학생들은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군사 조직에 편입한 학도 호국단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며, 학교를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는 학원 자율화를 요구하였다. 교사와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였고, 6·25 전쟁 유가족들은 양민 학살에 관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였다. 한편, 혁신 세력과 일부 학생들은 한반도 영세 중립화에 의한 통일이나 남북 협상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였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집권 초부터 윤보선 중심의 구파와 장면 중심의 신파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이 심하였다. 게다가 부정 축재자나 부정 선거 책임자 처벌에 소극적이었고, 친일파 청산과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새로운 치안 법률을 만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나 시민운동을 억누르기도 하였다.

 

4·19 혁명 직후 통일 운동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내세우며 독재를 강화하였고, 통일에 대한 논의도 제한하였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민주화와 경제적 자립뿐만 아니라 통일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통일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혁신 세력과 대학생 등 민간의 통일 논의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하나는 국제회의를 통해 한반도를 국제 사회가 보장하는 영세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영세 중립화론(중립화 통일론)이며, 다른 하나는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남북 협상에 의한 민족 자주적 입장의 평화 통일론(남북 협상론)이었다. 그러나 장면 정부는 유엔의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주장하며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에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한편, 1961년에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남북 학생 회담을 요구하는 통일 운동이 추진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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