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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4-1. 사회 구조와 생활 모습이 변화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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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 문화의 변화와 사회 운동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철도, 통신 등 각종 근대 시설이 들어섰다. 전차, 전기, 전화 등의 시설이 확대되고 관공서, 은행, 백화점 등이 들어서면서 경성의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외형적 변화와 더불어 양복이 점차 보편화되었고, 파마머리를 하는 등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한편, 1920년대 도로에서는 교통경찰이 좌측통행을 유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4-1. 사회 구조와 생활 모습이 변화하다

신여성은 개항 이후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로 1920~1930년대 한국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소비문화를 수용한 주체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뾰족구두, 단발머리 등 서양식 옷차림을 하고 쇼핑과 외식을 즐겼다.

식민지 근대화의 실상

일제는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국에 근대 문물과 제도를 확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은 우월하고, 한국인은 열등하다.’라는 의식을 조장하여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도시에 신작로를 내고 전차 선로와 철도, 항만을 부설하는 등 근대 시설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이 도시의 경제권을 장악하였고, 근대 문물의 혜택은 일본인과 일부 부유한 한국인만이 누릴 수 있었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시달렸고, 일제가 근대 문물 도입을 위해 각종 세금을 부과하면서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교통의 발달

일제는 1928년 함경선을 개통하면서 한반도에 X자형 간선 철도망을 완성하였다. 철도 노선의 확대로 국내는 물론 만주와 중국 등지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운행 시간이 규칙적이고 정확한 철도를 이용하면서 근대적 시간관념이 생겼고, 철도가 기존의 교통수단보다 빨라 이동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철도는 일제가 대륙 침략 전쟁을 확대하는 군사적 수단이었고, 한국의 각종 물자를 수탈하는 데 활용되었다.

 

도시 발달과 도시 빈민의 형성

경제 구조의 변화와 교통의 발달 등으로 도시에 인구가 증가하였다. 1910년대 이후 개항장이 도시로 성장하였고, 철도 부설로 기차역이 세워진 대전, 신의주 등이 발전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함흥, 청진 등 북부 지방의 공업 도시가 성장하였다. 한편, 군산, 목포 등은 항만 도시로 번성하였다. 대부분 도시에는 일본인 거주 지역과 한국인 거주 지역이 구분되었다.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의 한국인 거리(북촌)와 남쪽의 일본인 거리(남촌)로 나뉘어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지금의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남촌은 관공서, 은행, 상점, 백화점 등이 집중해 있어 경성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은 대부분 도시 외곽에 빈민촌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초라한 움막을 짓고 살았고, 지게 품팔이와 넝마주이를 하면서 힘든 삶을 이어 갔다.

 

산업 구조의 변화와 노동자의 삶

1920년대 일제는 자국의 공업 성장으로 발생한 잉여 자본을 투자하기 위해 한국의 식민지 공업화가 필요하였다. 회사령의 폐지로 한국인들이 기업을 세우고 일본 기업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공장이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인 기업 수와 자본금은 일본인 기업에 비해 적었고, 한국 기업은 양말, 고무신 등 조선 총독부의 공업 정책과 관련이 적은 분야에서 성장하였다. 또한, 이 시기 국내에 세워진 공장은 방직 공업이나 식료품 공업 등 경공업 중심이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공업화 정책으로 1차 산업의 비중이 줄고 광공업과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한국의 병참 기지 역할에 따른 석탄 액화, 제철, 기계 등 군수 공업과 관련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였다.

일본인 노동자가 고급 공업 기술을 독점하는 데 비해, 한국인 노동자는 단순 노무직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 노동자는 일본인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여성과 미성년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더욱 열악하였다.

 

일제 강점기 산업 구조의 변화

한국의 산업 구조 변화는 한국 경제의 발전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 통치와 원료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농촌의 개편과 농민의 삶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일본인 지주의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으로 한반도가 일본의 식량 공급지가 되면서 농민들의 삶은 매우 어려워졌다. 많은 농민이 자작농에서 자소작농으로, 자소작농에서 토목 공사장이나 광산 노동자로 몰락하였다. 경작지를 잃은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였다.

1930년대 초에는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농촌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면서 농민 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조선 총독부는 이를 무마하고자 1932년부터 농촌 진흥 운동을 실시하였으나 농민들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34년에는 조선 농지령을 제정하여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영 과정에서 소작농 관리자(마름)의 횡포를 통제하지 않고 지주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게다가 소작료도 여전히 높아서 법령의 제정만으로는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농촌 진흥 운동

춘궁 퇴치, 부채 근절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농가 소득 증가를 위해 가마니 짜기 등을 권장하였으나, 소작료 인하, 자영농 육성 등의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실시되었다.

 

조선 농지령

지주의 자의적인 소작권 이동을 막고 작물에 따라 소작 기간을 3~7년으로 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주제를 유지하면서 소작 쟁의를 줄이고 소작지의 생산력을 높이도록 소작 제도를 부분적으로 개량한 법령이었다.

 

생활 양식의 변화

근대화를 목표로 전개된 민족의 계몽 운동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제에 의해 전통 사회 구조와 생활 양식이 변화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식민지 규율을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생활 개선을 추진하였다. 삼림령을 제정하여 산에서 땔감 채취를 제한하였고, 새로운 도량형을 강요하고 양력 사용을 권장하였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 문물이 유입되면서 의식주 생활에 변화가 나타났다. 의생활에서는 고무신, 운동화, 구두, 양복 등이 확산되었고, 여학생들 사이에는 단발머리가 유행하는 등 서양식 복장이 점차 보편화하였다. 일제는 흰옷 대신에 색깔 있는 옷을 입게 하였고 중일 전쟁 이후에는 남성에게는 국민복을, 여성에게는 몸뻬라는 근로복을 입도록 강요하며 의복 생활을 통제하였다. 식생활에서는 커피와 빵, 아이스크림, 맥주 등 서양 식품이 소비되었고, 일본식 우동과 어묵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쌀이 부족하여 잡곡밥이나 나무껍질 등을 먹기도 하였다.

주생활에서는 1920년대부터 문화 주택이 도시를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하지만 농촌의 주택은 여전히 초가집이 대부분이었고, 토막민들은 도시 외곽에서 둑, 강가, 다리 밑 등지의 공터에 땅을 파고 짚이나 거적 같은 것을 둘러서 살았다.

 

모던걸과 모던보이

경성에서 주로 단발머리와 양장, 양복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던 신식 여성과 남성을 가리킨다.

 

몸뻬

통이 넓은 일본식 바지이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작업의 효율성을 내세우며 여성에게 몸뻬를 강요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일상생활의 변화

단발머리를 한 여성들

장난치던 아동들도 단발 미인 간다. 이거 봐라!”라고 떠들고, 가게에서 물건 팔던 사람들도 그들의 가는 모습을 유심히 본다. - 별건곤, 1926

지금 당신이 단발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얽매여 있던 하렘에 작별을 고한 것입니다. 얌전하게 땋아서 내린 머리는 얌전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이 시대에 뒤처진 봉건 시대의 꿈이 흐릅니다. - 동광, 1932

 

경성부의 토막민 문제

경성부의 발표에 의하면 경성부 내의 토막민 수가 1,583호이고 인구가 5,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미 그 수가 많은 것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거니와, 1928년의 통계에 나타난 것보다 거의 200호가 증가하였다. ...... 이것은 도시의 미관상이나 위생상으로도 큰 문제이고 토막민 자체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 보아 중대한 사회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동아일보, 1931.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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