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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4-2. 다양한 사회 운동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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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다양한 사회 운동이 일어나다

다양한 사회 운동이 일어나다

 

다양한 사상의 확산

3·1 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주권 재민에 기초하여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 공화주의가 민족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에는 이른바 문화 통치아래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 다양한 사상이 국내에 유입되었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개조론과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개조론은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던 상황에서 계몽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려는 문화 운동의 토대가 되었지만, 사회주의의 유입으로 사상적 주도권을 잃어 갔다.

사회주의는 3·1 운동 이후 국내에 유입되었다. 지식인들은 신문과 잡지에 사회주의를 소개하는 글을 싣고,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사회주의를 알렸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에서 사회주의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사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주도하였다.

 

개조론

사회진화론에 대한 비판 이론이다. 개조론이 유행하면서 나타난 사회 개조론, 국가 개조론, 민족 개조론 등은 1920년대 초 민족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었다. 이 중 이광수가 주장한 민족 개조론은 일본의 지배 아래 민족성을 개조하여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자는 내용으로, 사회주의 계열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농민 운동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농민들은 열악한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소작인 조합, 농민 조합 등을 만들어 지주의 횡포와 일제의 농촌 정책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소작료를 내리고, 지세와 각종 공과금을 지주가 부담할 것 등을 요구하며 소작 쟁의를 전개하였다. 전라남도 신안 암태도에서는 농민들이 높은 소작료에 반대하며 1923년 소작 쟁의를 일으켰다(암태도 소작 쟁의). 이들은 소작료를 내릴 것을 요구하면서 추수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등 투쟁을 벌였다.

1920년대 후반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더욱 발전하였다. 소작인조합은 자작농까지 참여하는 농민 조합으로 확대되었고, 1927년에는 전국적인 농민 운동 단체인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공황의 영향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비합법적인 농민 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자.’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걸고 계급 해방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암태도 소작 쟁의(1923~1924)

암태도 소작인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지주문재철이 70% 이상의 소작료를 징수하던 횡포에 맞서, 1년여에 걸친 투쟁 끝에 소작료를 40%로 낮출 수 있었다.

 

노동 운동

1920년 회사령의 폐지로 공장과 기업의 설립이 늘어나면서 노동자 수가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본인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고 긴 시간의 노동에 혹사당하는 등 노동 조건이 매우 열악하였다. 이에 한국인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이들의 편을 드는 일제에 맞서 임금 삭감이나 부당 해고에 반대하고, 노동 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 쟁의를 벌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노동자들은 지역별 직업별로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 단체에 참여하여 노동 조건과 민족 간 차별 대우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1921년 부산에는 부두 운반 노동자들이 파업하였고, 1923년에는 경성 고무 공장 여공들과 평양 양말 공장의 직공들이 파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하여 1924년에는 조선 노농 총동맹이 만들어졌다.

사회주의자들은 계급 해방을 위한 노동자들의 각성과 단결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1927년에 결성된 조선 노동 총동맹이 각 지방의 노동 쟁의를 이끌면서 노동 운동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노동 쟁의의 성격도 생존권 투쟁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1930년대 노동 운동은 농민 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비합법적인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도시의 공업 중심 지역과 함경도의 공업 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농민 노동 운동이 큰 성과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의 식민 통치 현실을 극복하려는 항일 투쟁으로 나아갔다.

 

조선 노농 총동맹

전국의 노농 단체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노농 계급을 해방할 것, 노동자의 계급 의식을 높일 것, 노동 시간을 8시간으로 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후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어 1927년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원산 총파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1928년 원산 인근의 라이징 선 석유 회사에서 일본인 현장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일본인 감독의 파면, 열악한 노동 조건의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시작하였다. 회사 측에서는 사과하고 노동자들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으나, 몇 달이 지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들을 탄압하였다. 그러자 원산 지역의 노동자들은 대규모 총파업을 벌였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을 협박하고 회유하였으며,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보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관련 인사들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파업을 이어 갔고, 전국 각지에서는 식량과 성금을 보내 노동자들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4개월여에 걸친 원산 총파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벌인 항일 투쟁이자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운동이었다.

 

청년 학생 운동

3·1 운동 이후, 높아진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청년과 학생들은 민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청년들은 1920년대 들어와 각종 청년회를 만들어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을 운영하며 민중 계몽에 힘썼다. 학생들은 학교별로 독서회 등 비밀 결사를 만들었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등교 거부, 수업 거부, 동맹 휴학 등의 방법으로 투쟁하며 식민지 교육 철폐와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등을 요구하였다. 19264월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 공산당은 학생 단체, 천도교 일부 세력과 힘을 모아 순종의 장례일인 610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으나, 학생들은 일제 경찰의 감시를 뚫고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격문을 뿌리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6·10 만세 운동).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이 운동을 함께 준비하면서 민족 유일당을 만들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1929년 광주에서는 한국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본 학생과 이를 말리던 한국 학생 사이에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이 일본 학생의 편을 들자, 이에 분노한 광주 지역의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신간회는 이를 전국적인 대중 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하였고,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투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시위와 동맹 휴학은 만주와 일본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3·1 운동 이후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운동이었다.

 

여성 소년 운동

일제 강점기에는 여성의 지위가 더욱 약화되었다. 일제는 재산 친권 상속 등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법률을 시행하였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만 취업할 수 있었고,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았다.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며 남녀평등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조선 여자 교육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를 만들어 여성 계몽을 위해 노력하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인 조선 여성 동우회는 여성 노동자들의 지위 향상을 주장하였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누어져 있던 여성 단체들은 1927년 신간회의 창립을 계기로 통합 단체인 근우회를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아이들의 지위는 여성과 마찬가지로 열악하였다. 대부분 아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공장이나 농촌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오랜 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가운데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고 바르게 키우자는 소년 운동이 일어났다. 소년 운동은 1921년 방정환을 중심으로 천도교 소년회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방정환은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하라는 의미에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후 천도교 소년회는 5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도 발행하였다.

 

형평 운동

갑오개혁으로 신분 차별이 법제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 강점기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백정들은 차별 대우에 항의하며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만들고 백정에 대한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전개하였다.

형평 운동은 언론과 사회주의 계열 등의 지지를 받아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전국 각지에 지사가 세워지면서 백정의 인권이 향상되었다. 나아가 조선 형평사는 다른 분야의 사회 운동 단체와 협력하면서 파업, 소작 쟁의 등에 참가하는 등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백정에 대한 차별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입학 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신분을 반드시 표시하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호적에 붉은 점 등을 표시하여 백정을 구별하였다.

 

형평 저울대 평평하다

백정들은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꿈꾼다는 뜻에서 형평 운동이라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신여성, 나혜석

개항 이후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을 전통적인 여성인 구여성에 반대되는 의미로 신여성이라고 불렀다. 신여성들은 특히 1920년대에 남성 중심의 사회에 저항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하였고,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적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자 하였다. 당시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고 귀국하여 사회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나혜석은 신여성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화가이자 시인, 소설가였던 나혜석은 남편과 세계 여행을 하다가 프랑스에서 유학하였다. 귀국 이후 프랑스에서 자유연애를 한 것이 논란이 되면서 남편과 이혼을 하였다. 나혜석은 남편과 이혼한 뒤 자신의 심경을 밝힌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여 남성 중심의 사회를 비판하였다.

 

다양한 사회 운동의 전개

첫째,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 대한 인격적 대우를 허락하게 하라.

둘째,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유상 노동을 폐지하게 하라.

셋째,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 소년 운동 선언, 1923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되고자 함이 본사(本社)의 중요한 뜻이다. 지금까지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압박을 받아 왔던가? …… 따라서 이 문제를 선결하는 것이 우리들의 급선무라고 설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 조선 형평사 설립 취지문, 1923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 운동이 시작된 것은 또한 이미 오래다. 그러나 회고하여 보면 여성 운동은 거의 분산되어 있었다. 그것에는 통일된 조직이 없었고 통일된 목표와 지도 정신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운동은 효과를 충분히 내지 못하였다. …… 우리가 실지로 우리 자체를 위하여 우리 사회를 위하여 분투하려면 우리 조선 자매 전체의 역량을 공고히 단결하여 운동을 전반적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조선의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 근우회 창립 취지문, 1927

 

1. 종래의 지정 소작료를 폐지할 것

2. 소작료는 생산의 절반을 분배할 것

3. 지세 및 부가세를 지주 부담으로 할 것

5. 지주 및 마름 등에 물품 증여의 습관을 전폐할 것

6. 지주에 대한 무상 노력을 전폐할 것

7. 물세를 전폐할 것

- 진주 노동자 대회 결의 사항,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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