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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6-2.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by 변교수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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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38년에 창설된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로, 창설 당시에는 200여 명으로 된 두 개의 부대였으나, 1940년에는 300여 명으로 늘었다.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된 한국인 병사들은 부대를 탈출하여 조선 의용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한인 애국단의 활동

국민대표 회의(1923)가 성과 없이 끝난 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 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침체된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하였다.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은 19321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 국왕이 타고 가는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의 의거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 신문이 이봉창의 의거 실패에 관해 아쉬워하는 기사를 보도하자,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국왕의 생일과 상하이 사변의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군과 여러 고위 관리를 처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던 중국인들의 태도가 변화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군관 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 간부를 키워 낼 수 있도록 협조하였고,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인의 무장 독립 투쟁을 허락하여 임시 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봉창

일본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 속으로

윤봉길 의사는 거사 당일 아침 김구에게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전달받고 일본군의 상하이 사변 승전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단상 중앙에 떨어져 그 자리에 있던 일본군 총사령관을 비롯한 고관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 용사가 단행하였다.”라고 하며 윤봉길의 의거를 높이 평가하였다.

 

민족 혁명당으로의 통합 운동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만주 일대에서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이후 중국 관내에서는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여 일제에 대항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 결과 의열단을 중심으로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미주 대한 독립단 등이 참여하여 민족 혁명당을 만들었다(1935).

민족 혁명당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만든 중국 관내 최대 규모의 통일 전선 정당이었다. 이 단체는 민주 공화국 수립, 토지의 국유화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김구 등 임시 정부를 고수하려는 독립운동 세력은 임시 정부의 해체를 전제로 한 민족 혁명당에 참가하지 않았고, 민족 혁명당은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조소앙, 지청천 등이 탈당하면서 통일 전선 정당으로써의 성격이 약해졌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민족 혁명당을 계승한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통합에 찬성하는 단체들이 모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1937).

 

한국 독립당

안창호, 김구, 조소앙 등이 임시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1930년에 조직한 정당이다. 지청천 등이 만주에서 결성한 한국 독립당과는 다른 정당이다.

 

민족 혁명당 강령

1. 당의

본 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원수이며 적인 일본의 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5천 년 독립 자주해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 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

 

한국 국민당 중심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윤봉길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인정과 지원을 받으며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상하이를 떠나 난징, 한구, 창사 등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임시 정부의 해체에 반대한 김구는 민족 혁명당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 국민당을 만들었다(1935).

한국 국민당은 민족 혁명당에서 탈당한 조소앙, 지청천 등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을 도모하였고, 미주 지역의 대한인 국민회 등의 단체와 함께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1937). 이로써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세력은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두 갈래로 통일되었다.

이후 김구와 김원봉이 중심이 되어 두 진영의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 의용대의 활동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은 1938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대를 만들었다.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 졸업생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 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대일 전선에 배치되어 정보 수집, 투항 권고, 포로 심문, 후방 교란 등 중국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며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가 중국 국민당 지역에 대한 공세를 늦추고 국민당 또한 일제에 맞서기를 꺼렸다. 중국 국민당의 소극적인 항일 투쟁에 반대한 조선 의용대의 대부분은 더욱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 세력이 대일 항전을 펼치고 있던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화북 지역에서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로 개편하고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반 소탕전 등에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조선 의용대는 호가장 전투 이후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편입되었다가 조선 의용군 화북 지대로 개편하였다.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은 조선 의용대의 일부는 김원봉의 지휘 아래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려는 노력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 선언서(1926)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성공을 위하여 운동하고 투쟁하는 혁명자들은 반드시 하나의 기치 아래 모여 하나의 호령 아래 단결해야만 비로소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바란다! 일반 동지는 깊이 양해하라!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한국의 절대 독립을 주장하라! 민족 혁명의 유일한 전선을 만들라! 전 세계 피압박 민중은 단결하라!

 

민족 혁명당 창립 8주년 기념 선언문(1943)

193575, 우리는 중국의 수도 남경에서 5개당을 통합하여 전체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당인 조선 민족 혁명당을 창립하였습니다. 이는 10여 년 이래 조선 혁명 통일 운동의 최대 성과일 뿐만 아니라, 해외 독립당의 혁명 전통의 찬란한 역사를 촉진하고 계승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조선 민족 혁명당 설립의 목적은 일본 제국주의를 전복하는 것이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 민족의 힘을 결집하여 한중 연합 항일 전선을 구축하였습니다.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김구와 김원봉이 제안한 성명서, 1939)

어떠한 방식에 의해 민족적 통일 기구를 구성하여도 그 기구는 현 단계의 전 민족적 이익과 공동적 요구에 의한 정강 아래 어떤 주의, 어떤 당파도 그 신하에 포용하여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전국적 무장 대오를 1개의 민족적 총기관으로서 지휘 가능한 조직체로 할 것이 요구된다. ...... 이와 같은 사명을 이행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관내에 현존하는 각 혁명 단체를 일률적으로 해소하고 현 단계의 공동 정강 아래 단일 조직으로 재편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현존 각 단체의 지방적 분열과 파생적 마찰을 정지하고 단결 제일의 목표 아래 일체 역량 및 행동을 통일하여 우리의 항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 각 단체의 표방하는 주의가 같지 않으나 현 단계의 조선 혁명에 대한 정치적 강령과 항일전의 상태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국외로 이주한 동포들의 삶

일제 강점기에 많은 한국인이 국외로 이주하면서 만주, 연해주, 일본, 미주 지역에 만들어진 한인 사회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국외로 이주한 동포들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자.

 

일본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경제 호황 속에 일본 기업들이 저임금 노동자를 필요로 하자, 많은 한국인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갔다. 이들은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로 이주하여 차별을 받으며 힘든 삶을 살았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동포들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강제 동원으로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이 늘어났고, 이들 중 일부는 광복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 오늘날 재일 동포 사회를 이루었다.

 

연해주

러시아 혁명 이후 한인들은 카레이스키(고려인)라 불렸다. 그러나 1937년 소련은 한국인들이 일제에 협력하는 것을 예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에 따라 한인 10만 명 이상이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강제로 이주당하였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이들의 후손이다.

 

미주

미주 동포들은 어려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독립운동 성금을 내놓으며 조국의 독립을 후원하였다. 독립 공채를 구매하거나 의연금 등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1910년 대한인 국민회를 조직하고 1941년에는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를 결성하여 외교 독립운동 등에 힘썼다. 광복 이후에는 주한 미군 배우자 등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미국으로의 입양과 학생들의 미국 유학도 활발하였다.

 

만주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토착민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한인 사회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만주의 한인 사회를 탄압하였고, 1920년대에는 간도 참변과 미쓰야 협정 등으로 만주 동포들이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이후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국내 한국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1940년대에 중국 국공 내전의 결과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중국 공민의 자격을 받았고, 1952년에는 옌볜 조선족 자치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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