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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7-1. 세계화에 따라 한국 경제가 변화하다

by 변교수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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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외환 위기와 사회 경제적 변화

19981월부터 4월까지 시민들은 자발적인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 기업가, 연예인, 정치인, 종교 지도자 등이 금을 기탁하며 참여를 독려하였고, 전국적으로 225톤 이상의 금이 모였다. 이렇게 모인 금을 수출해 정부는 외환 보유고를 22억 달러나 늘릴 수 있었다.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은 2의 국채 보상 운동이라고 불렸다.

 

7-1. 세계화에 따라 한국 경제가 변화하다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고 쌀 시장 개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자 농민들은 학생, 시민들과 함께 쌀 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우루과이 라운드의 재협상과 국회 비준 거부, 대통령의 협상 무효 선언과 이행 계획서 제출 중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세계화에 따라 한국 경제가 변화하다

 

시장 개방과 한국 경제

1 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맞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농산물, 섬유, 철강, 금융, 지적 재산권 등 개발 도상국의 이해를 좌우하는 분야 를 포함하여 전면적 시장 개방을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고, 1995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체제를 흡수 통합한 세계 무역 기구(WTO) 체제가 출범하였다.

세계 무역 기구 출범 이후 무역 장벽이 낮아지면서 국제 교역량이 증가하였고 세계 자본 시장은 통합되었다. 이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된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은 상품과 자본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세계화의 흐름에 탄력을 붙여 주었다.

 

전 세계적으로 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한국 경제는 1990년대 전반까지 성장을 지속하였다. 세계적으로 전자, 통신 산업이 발전하면서 반도체의 수출이 급증하였고, 여러 기업이 러시아, 중국, 동유럽 등지로 활발하게 진출하였다. 정부는 상품과 자본 시장을 개방하며 세계화를 추진하였고 공기업 민영화, 금융 규제 완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

1996년 우리나라는 이른바 선진국 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29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특징은 무엇일까?

대공황 이후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가의 개입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수정 자본주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이 오히려 비효율적인 데다 1970년대 석유 파동 이후 전 세계적으로 경기 침체가 나타나면서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을 비판하고 민간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가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다. 신자유주의는 정부 규제 완화 및 철폐, 복지 축소, 노동 시장의 유연성 강화, 공기업 민영화 등을 내세웠다. 그 결과 시장의 효율성은 높아졌지만,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커지면서 국가 간 경제 격차가 심화되는 등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외환 위기의 발생

1980년대부터 정부의 보호 아래 느슨하게 운영되던 재벌 기업은 개방화 국제화를 추구하는 세계 무역 기구 체제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웠다. 특히 급격한 시장 자율화와 경제 개방 속에서 대기업은 은행 자금을 무분별하게 빌려 사업을 확장하였다. 1997년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외환 및 금융 불안이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쳐 외국 투자자들이 대출을 대거 회수하였고, 이에 외환 보유고가 고갈되면서 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이어졌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1997년 말 국제 통화 기금(IMF)3에 구제 금융을 요청하여 긴급 자금을 지원받았다.

 

국제 통화 기금(IMF)

환율과 국제 수지를 안정시켜 국제 유동성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유엔의 전문 기구이다. 회원국의 요청이 있을 때는 기술 및 금융 지원을 직접 제공한다.

 

외환 위기의 극복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는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실시하고 외국 자본 유치에 힘썼다. 부실기업과 은행을 통폐합하거나 외국에 매각하였고,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부실 금융 기관을 정상화하였다. 공공 부문에서도 공기업 민영화와 경영 혁신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노동 부문에서는 노사정 위원회를 통해 정리 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를 도입하였으며, 고용 보험 확대와 근로 시간 단축 등의 노력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민은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여 외환 위기 극복에 힘을 보탰다. 전국 각지에서 수백 톤의 금이 모였고, 이는 부족한 외환을 보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정부와 국민의 노력으로 한국은 2001년 국제 통화 기금(IMF)의 지원금을 조기 상환하였다. 그러나 외환 위기 극복 과정에서 정리 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가 실시되면서 노동자들이 대량 해직되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크게 늘었다. 또한, 많은 자영업자가 도산하면서 중산층의 비중이 작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의 한국 경제

2000년대 들어 자유 무역이 전 세계에 확산함에 따라 국가 간 무역 장벽이 낮아지고 상품, 노동, 자본 등 여러 분야의 이동이 쉬워졌다. 한국은 2004년 칠레를 시작으로 미국, 유럽 연합(EU), 중국 등과 자유 무역 협정(FTA)을 맺어 무역 시장을 확대하였다. 반도체, 액정 화면(LCD), 자동차, 철강, 석유 화학 등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가진 산업이 약진하였으며, 정보 기술(IT)에 기반을 둔 전자 및 통신 등 첨단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2016년 기준으로 세계 9위의 무역 대국으로 발돋움한 한국 경제는 높은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첨단 정보 산업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어 성장하고 있다.

자유 무역 협정(FTA)

국가 간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을 위해 무역 장벽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협정이다. 시장 확대로 비교 우위에 있는 상품의 경우 수출과 투자가 촉진될 수 있지만, 협정 대상국에 비해 경쟁력이 낮은 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무역 수지

1974년 무역 수지 100억 달러를 달성하였던 한국 경제는 2011년 최초로 무역 수지 1조 달러를 이룩해 냈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과제

가속화되는 세계화로 한국 경제의 대외 무역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2007년 미국의 서민 주택 담보 파산 사태와 2009년 그리스 재정 위기로 국제 경기가 악화되었고, 이는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국내적으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졌고, 대기업이 자본력을 바탕으로 소상공업까지 진출하면서 서민 상권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또한,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사회 계층 간의 격차가 점차 커지고 있다. 도시와 농촌, 공업과 농업 간에 심화되는 불균형도 오늘날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경제의 과제,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유통 산업의 진흥과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고, 건전한 상거래 질서를 세우고자 유통산업발전법이 제정되었다. 20131월 시행된 이 법은 지자체장이 심야 시간인 24시부터 오전 10시까지 대규모 점포의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2회 의무 휴업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전통 시장의 매출을 늘리고, 골목 상권을 보호하며, 대규모 점포의 근로자들에게 휴식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로 시행되고 있다.

 

외환 위기 이후 국내 대기업들은 여러 비용을 줄이기 위해 아래도급 업체나 파견 업체 근로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근로자로서는 실질적으로 대기업의 지시에 따라 그 기업의 사업장에서 근무하지만, 근로자나 근무 환경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그 책임은 아래도급 업체나 파견 업체가 맡게 되면서 여러 문제가 나타났다. 이에 대법원은 대기업이 사내 아래도급 업체의 권한과 책임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므로 아래도급한 대기업도 부정 노동 행위를 시정할 주체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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