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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한국사의 창] 8-1. 북한이 권력 세습 체제를 이루다

by 변교수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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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북 화해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노력

공동 경비 구역(JSA) 판문점은 남과 북 사이의 장벽이자 소통의 통로이다. 1976년 도끼 만행 사건이 벌어질 당시 판문점에는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2018년에는 남과 북의 두 정상과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통일을 이야기하였다.

 

8-1. 북한이 권력 세습 체제를 이루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지시나 발언은 공문서나 언론 보도, 학술 논문 등에 실릴 때 특별한 활자로 인쇄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과 건물의 내부에는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 사진을 벽면의 중심부에 걸도록 하였다.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작업은 북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북한이 권력 세습 체제를 이루다

 

북한의 정치

1960년대 초 북한 정부는 중소 이념 분쟁을 계기로 정치, 외교, 사회, 군사, 문화에서 주체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이 과정에서 거대한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는 등의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남한에서 유신 체제가 성립될 무렵, 북한에서도 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되어 독재 체제가 강화되었다. 이 헌법에 따라 주체사상이 공식적인 통치 이념이 되었고, 국가 주석제가 도입되어 주석으로 취임한 김일성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아들인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하면서 김정일 체제가 들어섰다. 김정일은 1998년 헌법을 개정하여 주석직을 폐지하였고, 국방 위원장 자격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2009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군대가 사회를 이끈다는 선군 사상을 새로운 통치 방식으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2011년에는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그의 권력이 아들 김정은에게 승계되었고, 이로써 북한은 3대 권력 세습 체제를 확립하였다. 김정은이 집권 초기 핵무기 개발을 강행하면서 북한의 국제적 고립이 심화하였으나, 남북 정상 회담과 북미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1인 독재 체제를 뒷받침하는 주체사상

주체사상은 북한의 정치, 외교, 사회, 군사,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유일한 지도 이념이다. 북한에서 어떤 사상보다 최상위에 있으며, 사회의 모든 부분을 구속하는 초법적인 사상이다. 이 사상은 사상에서의 주체, 경제에서의 자립, 정치에서의 자주, 국방에서의 자위를 표방하며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해 1인 지배 체제를 구축하였고, 이후 주체사상을 북한 주민을 통제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1972년 제정된 사회주의 헌법에서는 주체사상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명문화하였다.

 

북한의 경제

1961년부터 북한은 경제 개발을 목적으로 제17개년 계획(1961~1967)을 추진하였지만, 중국과 소련의 경제 원조 축소와 군사비 증가 등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1970년대 들어 북한은 6개년 계획(1971~1976)을 수립하여 공업 생산력의 증대를 꾀하였다. 이 기간에 공업 총생산액은 크게 늘었고, 노동자와 농민의 실질 소득도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중공업 치중에 따른 소비재의 부진, 자립 경제 주장으로 인한 대외 교역의 한계 등으로 경제는 점차 어려워졌다. 이후 북한은 서구 선진국과의 수교, 차관 도입 등으로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였지만, 사회 기반 시설과 기술 부족 등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경제난을 겪은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수정하여 부분적으로 개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1984년 합작 회사 경영법(합영법)을 제정하여 외국 자본과의 합작 및 투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1991년에는 나진 선봉 경제 무역 지대를 설치하여 무역 지대 내에서의 자유 무역 시장 개장, 자영업 허용 등의 조처를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국제적인 교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자연재해가 지속적으로 겹치면서 북한 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많은 북한 주민이 굶어 죽는 상황까지 발생하였고, 북한을 탈출하는 탈북자도 크게 늘었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북한은 시장 경제 요소를 제한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20027·1 경제 관리 개선 조치를 통해 기업소와 공장에 경영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수익에 따른 분배의 차등화와 배급제 폐지 등을 시행하였다또한, 신의주 국제 경제 지대, 황금평 위화도 경제 지대, 개성 공업 지구, 원산 금강산 관광특구 등의 지정과 같은 대외 경제 개방 정책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 부족, 에너지난과 식량난 심화, 자연재해 등으로 북한의 경제 회복은 부진하며, 핵무기 개발 문제 등으로 북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경제적 제재가 계속되고 있다.

 

합영법(1984)

1조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합영법은 우리나라와 세계 여러 나라 사이의 경제 기술 협력과 교류를 확대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5조 합영 기업은 당사자들이 출자한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며 독자적으로 경영 활동을 한다.

7조 국가는 장려하는 대상과 해외 조선 동포들과 하는 합영 기업, 일정한 지역에 창설된 합영 기업에 대하여 세금의 감면, 유리한 토지 이용 조건의 제공 같은 우대를 한다.

 

북한의 사회 모습

북한의 주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직 생활을 하고, 국가로부터 의식주를 배급받는 등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생활 양식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홍수와 가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북한 주민들의 생활은 크게 바뀌었다.

 

심각한 경제난 이후 장마당이라고 불리는 시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북한 주민들은 배급받던 식량부터 의류, 집 등 대부분을 시장에서 해결하고 있다. 시장 경제가 부분적으로 도입되면서 기업소나 협동농장과 같이 배급제에 영향을 받던 전통적인 경영 방식은 다시는 유지되기 어려워졌고, 개인 간 상업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개인의 경제 활동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는 등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북한 주민의 경제생활 변화는 문화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경제난 이후 태어난 세대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시장을 통해 외부 문물을 접하며 성장하였다. 이 때문에 이들의 성장과 함께 외부 세계에 대한 문화적 수요도 커지고 있다. 한국 드라마나 미국 영화를 보거나 팝송을 즐겨 듣는 부류도 있고, 일부 대학생들의 경우에는 미국, 일본, 영국 등 주변 세계의 정치 상황과 관련된 소설을 선호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종교 활동의 자유, 그리고 여행 거주 이전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권을 무시하고, 정치범 수용소의 운영과 공개 처형과 같은 반인륜적 통치 방식을 유지함으로써 인권 침해를 지속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 사회는 각종 북한 인권 문제3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는 한편, 북한 주민의 인권 보장과 기본적인 자유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스마트폰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현재 북한에서는 아리랑’, ‘평양 터치’, ‘진달래등의 스마트폰이 생산되고 있다. 2002년경부터 고위층을 중심으로 휴대 전화를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2008년에는 이집트 휴대 전화 기업과 합작을 통해 3G 휴대 전화 서비스가 제공되기 시작하였다. 20097만여 명에 불과하였던 가입자 수는 10년도 되지 않아 580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앞으로도 가입자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15년을 전후하여 스마트폰 사용자가 급격히 늘어나 평양 시내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북한에서는 일부 기관을 제외하고는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하므로 북한 내 인트라넷을 이용하여 스마트폰을 사용해야 한다.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북한 사회의 폐쇄성이 극복될 가능성도 보이지만, 국영 통신사의 특성상 북한 당국이 주민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감시, 검열할 수 있다는 우려의 시각도 존재한다.

- 중앙일보, 2018.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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