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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다.

by 변교수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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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다.

인도의 이슬람화

6세기 중엽 굽타 왕조가 멸망한 후 인도 북부는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8세기부터 인도 서북부에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였고, 11세기 초부터는 이슬람 왕조인 가즈니 왕조, 고르 왕조가 인도 북부를 점령하였다. 13세기 초에는 델리를 수도로 삼은 이슬람 왕조가 등장하였다. 이후 300여 년 동안 다섯 개의 이슬람 왕조가 교체되었다(델리 술탄 왕조).델리 술탄 왕조에서는 힌두교도에게 관용 정책을 펼쳐 지즈야(인두세)만 부담하면 힌두교를 믿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와 함께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그러자 엄격한 카스트제에 불만이 많았던 힌두교도 중에는 인간 평등을 내세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인도 남부에서는 9세기 후반부터 촐라 왕국이 발전하였다. 촐라 왕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등과 교역하며 번영을 누렸다. 이 과정에서 인도 남부 지역의 힌두 문화가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무굴 제국의 성립과 발전

16세기 초 티무르의 후손으로 알려진 바부르가 아프가니스탄을 근거지로 삼아 인도 북부를 침입하였다. 뒤이어 그는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지막 델리 술탄 왕조를 무너뜨리고 델리를 중심으로 무굴 제국을 세웠다(1526). 이후 무굴 제국의 3대 황제 아크바르는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북부에 걸친 제국을 건설하고 아그라를 수도로 삼았다.

아크바르 황제는 관료제와 지방 행정 기구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정책을 펴 힌두교도에게 관직을 개방하고 비이슬람교도에게서 거두던 세금인 지즈야(인두세)를 폐지하였다. 또한 아크바르 자신도 토착 힌두교도와 결혼하여 힌두교 세력을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17세기 후반 아우랑제브 황제는 인도 남부의 데칸고원까지 정복하여 무굴 제국의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 제일주의를 지향하여 힌두 사원을 파괴하고 지즈야를 부활시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의 반발을 샀다. 이후 무굴 제국은 내부 분열과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 세력의 침투로 점차 쇠퇴하였다.

 

무굴 제국의 경제

무굴 제국은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내륙에 시장과 도시가 들어섰으며, 해안 지역에서는 무역항이 발달하였다. 대외 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져 무굴 제국은 중국,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지중해를 잇는 인도양 무역을 주도하였다. 무굴 제국의 수출품으로는 면직물과 견직물, 향신료가 대표적이었는데 직물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편, 15세기 말 포르투갈 상인들이 인도양 무역에 진출한 이후 이슬람 상인과 인도의 힌두 상인들은 무역의 주도권을 유럽 상인들에게 빼앗기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도 인도와의 무역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어 무굴 제국의 경제는 점차 침체되었다.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인도에 이슬람 문화가 전파되었다. 이후 종교, 언어, 건축 등에서 인도의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점차 융합되어 인도·이슬람 문화가 발전하였다.

무굴 제국에서는 페르시아어가 제국의 공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일상어로는 힌두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이 합쳐진 우르두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종교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절충한 시크교가 발전하였다. 건축 분야에서도 인도ᆞ이슬람 양식이 등장하였는데, 타지마할이 대표적이다. 회화에서는 페르시아의 세밀화와 인도 양식이 조화를 이룬 무굴 회화가 발달하였다. 무굴 제국에서 발달한 화려한 궁정 문화는 무굴 회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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