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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갑오개혁을 추진하다

by 변교수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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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갑오개혁을 추진하다

새로운 정권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갑신정변의 개혁안과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개혁 법안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일부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이는 완전한 독자적인 개혁은 아니었다.

 

군국기무처 설치와 제1차 개혁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체결한 이후 교정청을 설치하여 독자적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 대원군을 앞세워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다. 새 정권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갑신정변의 개혁안과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개혁 법안을 제정 공포하였다(1차 개혁, 1894).

정치 분야에서는 중국의 연호 대신 개국 기년을 사용하였다.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 사무를 분리하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였다. 기존의 6조를 8아문으로 개편하였고, 경무청을 중심으로 하는 경찰 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사간원을 비롯한 언론 기관과 과거제를 없앴다. 한편, 토지 산림 광산을 외국인에게 매매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일본에게는 경부선 부설권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하고, 여러 조세 항목을 지세와 호세로 통합하였다. 조세 금납제를 시행하고, 이를 위해 은본위 화폐 제도를 도입하여 은화와 동전을 발행하였다.

사회 분야에서는 신분 차별을 없애고 노비제를 폐지하였다.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였으며, 참형과 가혹한 고문 및 연좌제도 폐지하였다. 또한, 의사소통을 쉽게 하려고 공문서에 국문 또는 국한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청일 전쟁 중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

일본의 외무대신인 무쓰 무네미쓰가 청일 전쟁의 회고록인 건건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일본이 청일 전쟁에 주력하여 조선의 내정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군국기무처는 비교적 자율적으로 개혁을 실행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조선 내정의 개혁을 정치적 필요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 조선 내정의 개혁은 제일로 일본의 이익을 주된 목표로 삼는 정도에 그치되 이 때문에 굳이 일본의 이익을 희생시킬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 이는 원래 청일 양국 간에 얽혀 있는 난국을 조정하기 위한 하나의 정책이었던 것인데 상황이 바뀌어 결국 일본이 독자적으로 이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애당초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 과연 만족스러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심하였다.

 

대원군의 실각과 제2차 개혁

일본은 청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이후 구성된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은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제2차 개혁을 추진하였다. 189412, 고종은 종묘에서 자주독립의 맹세를 하고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인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이를 통해 청에 의존하는 관계를 끊고 국내외에 자주독립을 선포하였다.

정치 분야에서는 통치 구조를 국왕 중심에서 내각 중심으로 바꾸었다. 8아문을 7부로 고쳐 내각을 편성하고 내각 총리대신이 통할하게 하였다. 지방 행정은 8도를 23부로 개편하고, 부 목 군 현 등을 군으로 통일하여 23부에 소속시켰다. 기존의 군사 조직을 폐지하고 중앙에 훈련대를 두었는데 고종은 별도로 시위대를 창설하여 궁궐 호위를 전담시켰다. 또한, 정부 기관마다 행사하던 재판권을 재판소로 단일화하여 지방 재판소, 한성 재판소, 고등 재판소, 특별 법원 등을 설치하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근대적 예산 제도를 도입하고, 관세사와 징세서를 설치하여 조세 징수 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육의전과 공납제를 폐지하였고, 독점 상업권을 지니고 있던 보부상 단체인 상리국도 없앴다.

사회 분야에서는 교육입국 조서를 반포하고 한성 사범학교 관제, 소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 관제 등을 발표하였다.

 

명성 황후 피살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 간섭에 일본이 굴복하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영효가 명성 황후 폐위 음모의 혐의로 일본에 망명하자 고종은 박정양, 이완용 등 친러 친미적인 인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군인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조선에 공사로 파견하였다. 미우라 공사는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 해산당한 훈련대 무관 등을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 황후를 살해하였다(을미사변 1905)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훼손 재판이 열리다

18967,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훼손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재판이 열렸다. 당시 정성우라는 진사는 박정양, 이윤용, 안경수, 김가진, 서재필 등 개화파 대신들에 대해 관직을 탐하는 간사한 자라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일이 있으면 관리들은 사직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상소한 사람을 재판 없이 유배지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개화파 대신들은 정성우를 피고로 하여 고등 재판소에 민사 소송을 제기하였다. 고등 재판소는 정성우가 대신들의 명예를 손상하였다며 명예 회복금으로 각각 1천 원씩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정성우가 가난하여 이 돈을 못 낸다고 하자 재판소는 그를 형사 재판에 회부하여 태형 100, 징역 3년에 처하였다.

 

3차 개혁(을미개혁)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유길준 등 친일 관료로 구성된 내각은 훈련대를 해산하고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신설하였다. 정부의 권위를 세우고자 국호를 대조선 제국으로, 대군주를 황제로 바꾸려 하였으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 시기 태양력과 건양연호를 사용하였고, 종두법과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중단되었던 우편 사무도 다시 실시하였다. 정부의 개혁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을미사변으로 왕권의 위축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 파천, 1896). 이후 개혁 주도 세력이 제거되고 일부 관료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갑오개혁은 봉건적 통치 체제를 개혁하려 한 근대적 개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간섭 속에 추진되었고, 국방력 강화와 공업 진흥 등에 소홀하였다는 한계를 지닌다.

 

갑오개혁의 내용과 평가

홍범 14

1. 청국에 의존하는 관념을 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3. 대군주는 대신과 논의하여 국정을 결정하고, 종실과 외척의 간섭을 금한다.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는 분리하여 뒤섞이는 것을 금한다.

5.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확히 제정한다.

7. 조세의 부과와 징수, 경비의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

9. 왕실 및 각 관부 비용은 연간 예산을 작성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10. 지방 관제를 시급히 개정하여 이로써 지방 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12. 군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법을 실시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립한다.

13. 민법과 형법을 엄격하게 제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문벌 및 지벌에 구애되지 말고, 선비를 두루 구하여 인재를 등용한다.- 관보, 1894.12.자료2 갑오개혁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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