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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서구의 침략에 맞서다

by 변교수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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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구의 침략에 맞서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강화도 초지진은 19세기 후반 미국, 일본과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초지진에는 포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400여 년 된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포탄 자국은 1871년 미국 해군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초지진에 포격을 가하였을 당시에 생긴 것이다.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

2차 아편 전쟁 이후 러시아가 연해주를 얻어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자 조선에서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흥선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비밀리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를 금지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흥선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수많은 신자를 처형하였다(병인박해, 1866).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극동 함대의 로즈 제독을 보내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공격하였다(병인양요, 1866). 프랑스군은 갑곶진에 상륙한 뒤 강화부를 점령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조선인을 살해하였다. 이에 맞서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부대가 전투를 벌였고, 삼랑성(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가 항전하였다. 조선군의 저항으로 사상자가 생긴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났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강화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의궤를 비롯한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병인양요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절두산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절두산 순교 성지는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에 있는 천주교 유적이다. 절두산은 원래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렸다. 병인박해를 구실로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 함대는 양화진에 정박한 뒤 강화도를 다시 침략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침략에 대한 책임을 천주교 신자에게 물어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였다. 이로 인해 잠두봉은 머리를 자른다.’라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는 당시 처형에 쓰였던 돌형구가 남아 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1866년 대포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에 식량, 땔감 등을 제공하며 물러가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원들은 조선의 관리를 감금하고 횡포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양 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제너럴셔먼호 사건).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들어와 몇 차례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그러자 오페르트는 프랑스 선교사, 미국 자본가의 지원을 받아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였다(1868). 주민들의 저항으로 도굴에 실패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과 경계심이 더욱 높아졌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군함과 병력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였다(신미양요, 1871).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는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가 격렬하게 항전하였으나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그런데도 흥선 대원군이 통상 수교 협상에 응하지 않자 미군은 퇴각하였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2를 세웠다. 이러한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서양 세력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았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열강의 공격에 맞선 조선

서구 열강의 공격

프랑스군의 공격

1015일 도세리 함장은 (강화도의 갑곶) 마을을 정찰하러 갔다. 사격이 오가던 끝에 우리 병사(프랑스군)가 성벽을 타고 올라가자 배후를 공격당한 조선인 초병들이 도망쳐 버렸다. 이 교전으로 우리는 초병들의 깃발을 차지하였다. - 앙리 주앙의 보고서

미군의 공격

그들 조선군은 뛰어난 용기를 가지고 맞서 싸우면서 성벽에 올라 미군에게 돌을 던졌다. 창칼로 상대하는데 창칼이 없는 병사들은 맨손으로 흙을 쥐어 적군의 눈에 뿌렸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다가오는 적군에게 죽기로 싸우다 마침내 총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

흥선 대원군이 관료에게 보낸 문서(1866).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 용호한록

척화비 건립

홍순목이 아뢰기를, “병인년 이후 서양인을 배척한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오랑캐들이 침범하고 있지만 화친에 대해서는 절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먼저 정벌하는 위엄을 보이면 ...... 누군들 우러러 받들지 않겠습니까?” ...... 이때에 종로 거리와 각 도회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 고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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