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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유행하다

by 변교수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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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유행하다

고려 인종이 병에 걸려 위독하여지자 왕의 회복을 기원하는 여러 종교 행사가 열렸다. 절에서 부처에게 기도하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에서 제사를 지내는 한편, 유교와 도교의 신에게도 빌었다. 무당이 인종의 병에 대해 척준경의 원혼이 깊은 탓이라 하자 이 말에 따라 이미 사망한 척준경을 사면하고 새로 쌓은 벽골제의 제방을 허물기도 하였다.

토착 신앙의 유행과 관련 서적의 편찬

고려에서는 불교, 유교와 더불어 토착 신앙, 도교, 풍수지리설 등이 유행하였다. 국가에서는 동명성왕과 태조 왕건을 신으로 섬겼고, 국왕도 용의 후손으로 여겨 신성시하였다. 개경과 서경에서는 하늘의 신령과 산, , 용을 섬기는 팔관회를 매년 성대하게 열었다. 지방에서도 산신과 수신을 위한 축제를 베풀었고, 고을의 위인을 수호신으로 섬겼다.

도교는 주로 귀족과 왕실에서 믿었다. 귀족은 안락한 생활을 하며 신선술에 관심을 가졌고, 왕실에서는 도교 사원을 세우고 초제를 열어 국왕의 장수를 빌었다. 그러나 이 시기 도교는 독자적인 교리 체계와 교단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예언 사상과 결합하여 유행하였다. 서경 길지설에 따라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고, 묘청 세력이 서경 천도를 추진할 때도 이용되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양이 남경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또한, 다양한 토착 신앙과 사상을 수용한 서적의 편찬이 활발하였다. 구삼국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가 신비한 내용과 함께 수록되었고, 해동비록에는 풍수지리설과 음양설 등 각종 예언을 종합하였다. 승려 일연은 불교의 설화적 전승을 중심으로 민간 신화 등을 수집하여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기록하여 통합된 민족의식을 드러냈다.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강릉 단오제

고려 시대에는 고을에 수호신을 모신 신사를 두고 제사 지냈다. 수호신은 대개 고을의 성립에 공헌한 위인이었다. 강릉 단오제 역시 강릉의 수호신을 모시고 즐기는 고려의 축제가 이어진 것이다. 강릉 단오제의 유래와 관련해 고려사에는 강릉의 호족 왕순식이 태조 왕건을 돕기 위해 대관령에 이르렀을 때 기이한 스님(범일 국사)을 모신 사당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말의 선종 승려인 범일 국사가 이후 대관령 산신으로 모셔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강릉 단오제는 51일부터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어 며칠에 걸쳐 무당이 굿을 하고 관노 가면극을 한다. 전통 민속의 원형을 간직한 축제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교 사상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고려 시대에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유교는 교육과 국가 의례, 역사서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려 정부가 중앙에 국자감, 지방에 향교를 세워 유학 교육에 힘쓰면서 뛰어난 유학자도 많이 나왔다. 최승로는 유교 정치를 주장하여 성종의 정책을 뒷받침하였고, 고려 중기에는 최충이 9재 학당을 설립한 이후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유교 사관에 따른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김부식은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구삼국사의 신비한 내용을 대폭 삭제하였다. 이는 무신 정권기에 이규보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승휴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기록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으나 이 책에서는 고려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인식하였다.

고려 말에는 원으로부터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제현은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이후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성리학을 확산시켰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가 성리학을 개혁 사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성리학은 국가와 사회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이 시기에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이제현은 기존 역사 기록을 성리학적 명분론에 맞추어 재해석하였다.

 

삼국사기동명왕편의 역사 인식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가을 9월에 동명성왕이 돌아가시니 그때 나이가 마흔 살이었다. 용산에 장사 지내고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 『삼국사기

가을 9월에 동명성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가 마흔 살이었다. 태자가 동명성왕이 남긴 옥 채찍을 대신 용산에 장사 지냈다.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공자는 괴이한 힘과 어지러운 신을 말씀하지 않았다. ...... 구삼국사를 보니 ...... 처음에는 믿지 못하였는데, 반복하니 환상이 아닌 신성함이며, 귀가 아닌 신이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이를 생략하였다.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 여긴 것 같다.

 

불교의 발달

국가의 불교 보호와 서적 편찬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발달하였다. 국가에서는 국사와 왕사 제도를 마련해 불교에 국교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또한, 승과 제도를 시행하여 합격자에게 승계를 주었으며, 승록사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불교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고려는 불교를 국가 통합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고려 정부는 대규모 사찰을 지어 국가의 안녕과 국왕의 장수를 빌었다. 외적이 침입하면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극복하고자 대규모 법회를 열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조판하였고, 고종 때 몽골이 침략하자 팔만대장경판을 조판하였다. 불교로서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져 각훈은 우리나라 불교의 독자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해동고승전을 지었다. 한편, 선종의 수행서인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다.

선종과 교종의 통합 노력

고려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숙종 때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고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선종까지 포섭하려 하였다.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의 수행을 아울러 강조한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천 사후에 교단이 분열하여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지속하였다.

무신 정변으로 교종이 쇠퇴하고 선종이 융성하자 선종 승려를 중심으로 불교계를 개혁하려는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조계종을 이끈 지눌은 불교계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선교 일치를 주장하며 정혜결사를 조직하였다. 참선 수행과 교학 공부의 병행을 주장한 지눌의 결사 운동이 호응을 얻으면서 수선사가 성립하였다.

한편, 천태종의 요세는 백련결사를 맺었다. 백련결사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참회와 염불 수행을 강조하여 글을 읽지 못하거나 참선할 여유가 없었던 백성의 환영을 받았다.

원 간섭기 불교의 변화

원 간섭기에는 불교의 개혁적 성향이 크게 약화하였다. 불교 사찰은 원과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아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수행보다는 복을 비는 행위에 힘썼다. 고려 말 사원들이 고리대를 일삼으며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농민을 노비로 만드는 등 불교계의 폐단이 심해졌다. 이에 불교가 백성과 멀어지고 신진 사대부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왕실과 권세가의 후원으로 화려한 불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원으로부터 새로운 성향의 불교가 유입되면서 보우, 혜근 등의 승려가 임제종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과학의 원리가 반영된 팔만 대장경판

대장경판의 재료 선정

몽골이 고려에 침입하자 최씨 무신 정권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판을 간행하였다. 대장경판의 제작과 보관 과정에는 선조들의 지혜와 과학 원리가 반영되었다. 경판의 재목이 될 나무는 굵고 곧은 것을 골라 바닷물에 한두 해 담가 두었다. 그 뒤 소금물에 삶고 건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소금이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이 과정을 통해 경판이 비틀어지는 현상을 줄일 수 있었다.

대장경판의 제작

대장경판을 제작할 때는 경문을 쓴 한지를 경판에 뒤집어 붙여 놓고 글씨를 양각하였다. 8만여 장에 달하는 목판에 글씨를 새겼는데 글자체가 균일하고 아름다워 당시의 뛰어난 목판 인쇄술을 보여 준다. 경문을 새긴 후에는 경판끼리 부딪치는 것을 막고 통풍이 잘되도록 경판 양 끝에 각목을 붙인 후 네 귀퉁이에 구리판을 붙인 마구리 처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옻칠을 하여 방충 효과를 높였다.

대장경판의 보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15세기경에 지은 건물이다. 장경판전의 벽면에는 위아래로 크기가 다른 두 창을 두어 외부의 건조한 공기가 들어와 대장경판 사이를 통과한 뒤 천천히 빠져나가게 설계하였다.

한편 숯, 소금, 횟가루를 흙과 섞어 바닥에 깔아 다져서 일정한 습도를 유지하게 하였다.

 

문화로 보는 고려의 다원성

중앙과 지방 문화의 조화

고려에서는 청자, 불화, 나전 칠기 등 세련된 중앙의 문화와 거대한 불상, 성황 신앙 등 토속적이면서 역동적인 지방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어 발달하였다. 고려의 도공들은 발달한 입사 기법과 나전 기법을 청자 제작에 적용함으로써 상감 청자를 만들어 냈다. 중앙의 권세가들은 청자를 생활용품에 두루 사용하면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였다. 고려 초에는 하남 하사창동 철제 석가여래 좌상과 같은 대형 철불을 제작하고,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 입상과 같은 거대한 석불도 만들었다. 이러한 불상들은 조형미는 다소 부족하나 소박한 지역적 특색을 잘 보여 준다.

외국 문화의 수용

고려 시대에는 개방적인 대외 정책을 펼치면서 거란, 여진, 몽골 계통의 외국인이 고려에 들어왔다. 이들이 고려 사회에 정착하면서 고려의 주민 구성이 다양해졌고 문화도 다채로워졌다. 고려 전기에는 송과 교류하여 불경, 차 문화 등을 받아들였고, 송에서 들어온 대성악을 궁중 음악인 아악으로 발전시켰다. 고려에 들어온 거란인은 여러 기구와 직물을 만들며 고려의 수공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원의 복식과 변발 등 몽골풍이 유행하였고, 원의 건축 양식도 수용하였다.

 

 

토착 신앙의 유행과 관련 서적의 편찬

고려에서는 불교, 유교와 더불어 토착 신앙, 도교, 풍수지리설 등이 유행하였다. 국가에서는 동명성왕과 태조 왕건을 신으로 섬겼고, 국왕도 용의 후손으로 여겨 신성시하였다. 개경과 서경에서는 하늘의 신령과 산, , 용을 섬기는 팔관회를 매년 성대하게 열었다. 지방에서도 산신과 수신을 위한 축제를 베풀었고, 고을의 위인을 수호신으로 섬겼다.

도교는 주로 귀족과 왕실에서 믿었다. 귀족은 안락한 생활을 하며 신선술에 관심을 가졌고, 왕실에서는 도교 사원을 세우고 초제를 열어 국왕의 장수를 빌었다. 그러나 이 시기 도교는 독자적인 교리 체계와 교단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예언 사상과 결합하여 유행하였다. 서경 길지설에 따라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고, 묘청 세력이 서경 천도를 추진할 때도 이용되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양이 남경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또한, 다양한 토착 신앙과 사상을 수용한 서적의 편찬이 활발하였다. 구삼국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가 신비한 내용과 함께 수록되었고, 해동비록에는 풍수지리설과 음양설 등 각종 예언을 종합하였다. 승려 일연은 불교의 설화적 전승을 중심으로 민간 신화 등을 수집하여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기록하여 통합된 민족의식을 드러냈다.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강릉 단오제

고려 시대에는 고을에 수호신을 모신 신사를 두고 제사 지냈다. 수호신은 대개 고을의 성립에 공헌한 위인이었다. 강릉 단오제 역시 강릉의 수호신을 모시고 즐기는 고려의 축제가 이어진 것이다. 강릉 단오제의 유래와 관련해 고려사에는 강릉의 호족 왕순식이 태조 왕건을 돕기 위해 대관령에 이르렀을 때 기이한 스님(범일 국사)을 모신 사당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말의 선종 승려인 범일 국사가 이후 대관령 산신으로 모셔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강릉 단오제는 51일부터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어 며칠에 걸쳐 무당이 굿을 하고 관노 가면극을 한다. 전통 민속의 원형을 간직한 축제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교 사상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고려 시대에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유교는 교육과 국가 의례, 역사서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려 정부가 중앙에 국자감, 지방에 향교를 세워 유학 교육에 힘쓰면서 뛰어난 유학자도 많이 나왔다. 최승로는 유교 정치를 주장하여 성종의 정책을 뒷받침하였고, 고려 중기에는 최충이 9재 학당을 설립한 이후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유교 사관에 따른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김부식은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구삼국사의 신비한 내용을 대폭 삭제하였다. 이는 무신 정권기에 이규보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승휴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기록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으나 이 책에서는 고려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인식하였다.

고려 말에는 원으로부터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제현은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이후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성리학을 확산시켰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가 성리학을 개혁 사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성리학은 국가와 사회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이 시기에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이제현은 기존 역사 기록을 성리학적 명분론에 맞추어 재해석하였다.

 

삼국사기동명왕편의 역사 인식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가을 9월에 동명성왕이 돌아가시니 그때 나이가 마흔 살이었다. 용산에 장사 지내고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 『삼국사기

가을 9월에 동명성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가 마흔 살이었다. 태자가 동명성왕이 남긴 옥 채찍을 대신 용산에 장사 지냈다.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공자는 괴이한 힘과 어지러운 신을 말씀하지 않았다. ...... 구삼국사를 보니 ...... 처음에는 믿지 못하였는데, 반복하니 환상이 아닌 신성함이며, 귀가 아닌 신이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이를 생략하였다.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 여긴 것 같다.

 

불교의 발달

국가의 불교 보호와 서적 편찬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발달하였다. 국가에서는 국사와 왕사 제도를 마련해 불교에 국교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또한, 승과 제도를 시행하여 합격자에게 승계를 주었으며, 승록사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불교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고려는 불교를 국가 통합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고려 정부는 대규모 사찰을 지어 국가의 안녕과 국왕의 장수를 빌었다. 외적이 침입하면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극복하고자 대규모 법회를 열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조판하였고, 고종 때 몽골이 침략하자 팔만대장경판을 조판하였다. 불교로서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져 각훈은 우리나라 불교의 독자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해동고승전을 지었다. 한편, 선종의 수행서인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다.

선종과 교종의 통합 노력

고려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숙종 때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고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선종까지 포섭하려 하였다.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의 수행을 아울러 강조한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천 사후에 교단이 분열하여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지속하였다.

무신 정변으로 교종이 쇠퇴하고 선종이 융성하자 선종 승려를 중심으로 불교계를 개혁하려는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조계종을 이끈 지눌은 불교계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선교 일치를 주장하며 정혜결사를 조직하였다. 참선 수행과 교학 공부의 병행을 주장한 지눌의 결사 운동이 호응을 얻으면서 수선사가 성립하였다.

한편, 천태종의 요세는 백련결사를 맺었다. 백련결사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참회와 염불 수행을 강조하여 글을 읽지 못하거나 참선할 여유가 없었던 백성의 환영을 받았다.

원 간섭기 불교의 변화

원 간섭기에는 불교의 개혁적 성향이 크게 약화하였다. 불교 사찰은 원과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아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수행보다는 복을 비는 행위에 힘썼다. 고려 말 사원들이 고리대를 일삼으며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농민을 노비로 만드는 등 불교계의 폐단이 심해졌다. 이에 불교가 백성과 멀어지고 신진 사대부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왕실과 권세가의 후원으로 화려한 불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원으로부터 새로운 성향의 불교가 유입되면서 보우, 혜근 등의 승려가 임제종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과학의 원리가 반영된 팔만 대장경판

대장경판의 재료 선정

몽골이 고려에 침입하자 최씨 무신 정권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판을 간행하였다. 대장경판의 제작과 보관 과정에는 선조들의 지혜와 과학 원리가 반영되었다. 경판의 재목이 될 나무는 굵고 곧은 것을 골라 바닷물에 한두 해 담가 두었다. 그 뒤 소금물에 삶고 건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소금이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이 과정을 통해 경판이 비틀어지는 현상을 줄일 수 있었다.

대장경판의 제작

대장경판을 제작할 때는 경문을 쓴 한지를 경판에 뒤집어 붙여 놓고 글씨를 양각하였다. 8만여 장에 달하는 목판에 글씨를 새겼는데 글자체가 균일하고 아름다워 당시의 뛰어난 목판 인쇄술을 보여 준다. 경문을 새긴 후에는 경판끼리 부딪치는 것을 막고 통풍이 잘되도록 경판 양 끝에 각목을 붙인 후 네 귀퉁이에 구리판을 붙인 마구리 처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옻칠을 하여 방충 효과를 높였다.

대장경판의 보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15세기경에 지은 건물이다. 장경판전의 벽면에는 위아래로 크기가 다른 두 창을 두어 외부의 건조한 공기가 들어와 대장경판 사이를 통과한 뒤 천천히 빠져나가게 설계하였다.

한편 숯, 소금, 횟가루를 흙과 섞어 바닥에 깔아 다져서 일정한 습도를 유지하게 하였다.

 

문화로 보는 고려의 다원성

중앙과 지방 문화의 조화

고려에서는 청자, 불화, 나전 칠기 등 세련된 중앙의 문화와 거대한 불상, 성황 신앙 등 토속적이면서 역동적인 지방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어 발달하였다. 고려의 도공들은 발달한 입사 기법과 나전 기법을 청자 제작에 적용함으로써 상감 청자를 만들어 냈다. 중앙의 권세가들은 청자를 생활용품에 두루 사용하면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였다. 고려 초에는 하남 하사창동 철제 석가여래 좌상과 같은 대형 철불을 제작하고,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 입상과 같은 거대한 석불도 만들었다. 이러한 불상들은 조형미는 다소 부족하나 소박한 지역적 특색을 잘 보여 준다.

외국 문화의 수용

고려 시대에는 개방적인 대외 정책을 펼치면서 거란, 여진, 몽골 계통의 외국인이 고려에 들어왔다. 이들이 고려 사회에 정착하면서 고려의 주민 구성이 다양해졌고 문화도 다채로워졌다. 고려 전기에는 송과 교류하여 불경, 차 문화 등을 받아들였고, 송에서 들어온 대성악을 궁중 음악인 아악으로 발전시켰다. 고려에 들어온 거란인은 여러 기구와 직물을 만들며 고려의 수공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원의 복식과 변발 등 몽골풍이 유행하였고, 원의 건축 양식도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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