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유교 이념에 따라 통치 체제를 정비하다.

by 변교수 2023. 5. 21.
반응형

5. 조선의 정치 운영과 세계관의 변화

조선 건국 초에는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여 통치에 활용하는 동시에 조선의 건국을 천하에 알렸다. ‘혼일은 중화와 오랑캐를 아우른다는 뜻으로 혼일강리는 전 세계를 의미한다. 이 지도는 당시로써는 매우 정확하게 그려진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중앙에 중국을 가장 크게 그려 중화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드러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의 세계관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점차 변화하였다.

 

1. 유교 이념에 따라 통치 체제를 정비하다.

조선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의 주민 등록증처럼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를 지니고 다녔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모든 양인 남자에게 발급하였고, 호패에는 주인의 이름과 출생 연도, 과거 급제 사실, 직위 등의 정보를 적었다. 조선 정부는 호패를 세금을 거두거나 군사를 징발하는 등 통치에 활용하였다.

 

조선의 건국과 유교 정치의 확립

중국에서는 14세기 들어 원이 쇠퇴하고 한족 농민 반란군을 이끈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였다(1368).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이성계와 급진파 신진 사대부는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뒤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태조와 함께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운 급진파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을 강조하였으며, 통치 제도의 정비에 이바지하였다.

태종은 공신과 왕족들이 소유한 사병을 없애고 재상의 권한을 약화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양전 사업과 호패법을 시행하여 국가 재정을 늘렸다. 강화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종은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국왕과 관리들이 함께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 제도를 활성화하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관리들의 학문 연구를 장려하였다.

세종은 유교의 덕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각종 편찬 사업 등을 이루었다.

세조는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과 경연 제도를 없애 언론 활동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각종 법전과 명령들을 종합한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성종은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을 설치하여 경연을 활성화하였다. 또한 경국대전을 완성한 뒤 반포하고 통치 조직을 정비하여 유교적 법치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통치 제도의 정비

조선은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통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이를 성문화하였다. 중앙 정치 조직3은 왕 아래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의정부는 재상들의 합의로 정책을 심의 결정하면서 국정을 총괄하였고, 6조는 직능에 따라 정책과 행정을 나누어 맡아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조선 초에는 정국의 변화에 따라 6조 직계제를 시행하거나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가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보다 국왕의 명령이나 관직 임명에 개입하는 권한이 축소된 대신 사간원을 언론 전담 기구로 독립시켰다. 3사의 언론 활동은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고관은 물론 국왕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

한편, 국왕의 비서 기구인 승정원과 국가의 중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다.

조선은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여 국왕의 권력이 직접 백성에게 미칠 수 있도록 하였다.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그 아래 부 목 군 현을 두어 수령을 보냈다. 또한,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를 일반 군현으로 승격하거나 주변 군현에 통합하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수령은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을 행사하며 백성을 지배하였다. 향리는 고려 시대보다 지위가 낮아졌고, 수령에게 직속되어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중앙과 지방의 일원적 통치 체제가 강화되었다.

군사 제도는 양인 남성으로서 현역 군인으로 복무하는 정군과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으로 편성하였다. 중앙군인 5위는 궁궐과 수도를 방위하였고, 지방군은 국방상 중요한 지역인 영과 진을 지키며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조선 초에는 잡색군을 두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였다.

조선은 교통 통신 제도도 정비하였다. 국경의 상황을 중앙에 신속히 알리기 위해 봉수제를 정비하고, 공문 전달과 공물 수송을 위한 역참제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조운제를 운영하여 조세를 한성으로 운송하였다.

관리는 과거와 음서, 천거 등을 통해 등용하였다.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로 운영하였고, 문과를 가장 중시하였다. 고려와 달리 무과를 제도화하였으며, 잡과는 해당 관청에서 별도로 실시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보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대상이 줄었고,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문과에 합격하여야 했다. 교육 제도는 관리 선발 제도와 연결하여 운영하였으며, 주로 문관 양성을 위한 유학 교육을 강조하였다.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향교를 세웠다.

 

6조 직계제와 의정부 서사제

6조 직계제는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한 제도로 왕권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6조에서 담당하는 모든 일을 의정부에서 논의한 뒤 국왕에게 보고하게 한 제도이다

의정부의 여러 일을 나누어 6조에 귀속하였다. 처음에 상(태종)은 의정부의 권한이 막중함을 염려하여 이를 없앨 생각이 있었지만, 신중히 여겨 서둘지 않았다가 이때 이르러 행하였다. ...... 의정부가 관장한 일은 사대문서와 중죄수의 재심에 관한 것뿐이었다. - 태종실록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의정부에 건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 시행한다. 다만 이조 병조의 관직 제수, 병조의 군사 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 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 세종실록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