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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다원적인 사회를 운영하다.

by 변교수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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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의 사회와 사상

고려에서는 매년 겨울 개경과 서경에서 팔관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팔관회는 다양한 신앙이 융합된 대규모 종교 행사이자 축제였고, 개국 공신을 추모하는 위령제도 겸하였다. 팔관회에서는 여진과 탐라의 지배층이 조공을 바쳤으며, 외국 상인들도 다양한 물건을 가지고 와 무역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난 신하는 팔관회를 기리는 글을 지어 국가와 국왕을 찬양하였다.

 

1. 다원적인 사회를 운영하다.

고려 시대에는 특수 행정 구역인 소에서 구리, , 자기, 종이, 먹 등을 생산하여 국가에 바쳤다. 소의 주민은 군현의 주민과 같은 신분이었으나 이들에 비해 공물 부담이 과중하여 고통받았다. 정부는 소와 같은 특수 행정 구역이 전쟁 등에서 공을 세우면 군현으로 승격시켜 준 반면, 적에게 항복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군현은 특수 지역으로 낮추었다.

 

고려의 신분 구성

고려인의 신분은 법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었다. 양인은 다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구분되었고, 양인 지배층은 왕족과 중앙의 고위 관리, 상급 향리와 중간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양인 지배층을 이룬 중앙의 고위 관리들은 그 후손들이 쉽게 관리가 될 수 있어 지속해서 재상을 배출하는 문벌을 형성하였다. 상급 향리는 호장, 부호장이 되어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지방군을 통솔하였다. 이들은 과거 응시에 제한이 없어 과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특히 고려 말 신진 사대부는 향리 출신이 많았다.

양인 중간 계층은 관청에서 말단 행정을 담당한 서리, 궁중 실무를 담당한 남반,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하급 장교 등으로 구성되었다. 향 부곡 소 등 특수 지역의 향리는 중앙의 서리나 하급 관리가 될 수 있었지만, 과거 응시에 제한을 받거나 과거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양인 피지배층은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향 부곡 소 등 특수 지역의 주민으로 이루어졌다.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이 양인의 대부분을 구성하였고, 이들은 백정이라 불리며 국가에 전세와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부곡 소 등 특수 지역 주민도 국역을 지는 양인이었지만 군현민과 비교하면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이들은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길 수 없었고,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부모 중 한쪽이 특수 지역 주민이면 자녀도 특수 지역에 소속되었다.

천인은 노비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었고, 역을 부담할 의무가 없었다. 공노비는 수공업품을 생산하거나 관청의 잡무를 보았으며, 농업에 종사하며 신공을 바치기도 하였다. 사노비는 주인집에서 같이 사는 솔거 노비와 떨어져 살면서 신공을 바치는 외거 노비로 구분되었다.

호장

향리의 우두머리로 해당 고을 향리들을 통솔하고 실무 행정을 총괄하였다.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지방 호족 출신이 많았다.

 

신분의 유동성

고려의 신분제는 신분의 구분이 분명하거나 엄격하지 않아서 신라의 골품제보다는 개방적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수조지를 받고 직역을 담당한 정호층을 통해 양인 내부의 계층 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향리나 하급 장교, 기인3 등으로 구성된 정호는 과거에 합격하여 고위 관리가 되거나 군공을 세워 무관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양인 피지배층도 중앙 관리가 되는 것이 가능하였다. 백정은 법제상 과거에 응시할 수 있어 과거를 통해 하급 관리가 되었고, 하급 관리의 후손들은 다시 제술과에 응시하여 고위 관리가 되었다. 또한, 정호에 빈자리가 생기면 백정 중에서 선발하여 직역과 토지를 주고 정호로 삼았다.

한편, 노비 중 일부는 주인에게 재물을 주어 양인이 되기도 하였고, 큰 공을 세워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하거나 관직을 받을 수도 있었다.

기인(其人) 고려 초 지방 세력의 자제를 수도에 인질로 머물게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기인은 점차 위상이 낮아져 중앙 관청의 잡무에 종사하거나 출신 지방과 관련된 일을 자문하고 처리하였다.

정호 특정 직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일정 단위의 토지인 전정을 받았다.

백정(白丁) 고려에서 백정은 관직이나 직역이 없는 양인을 뜻하였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도살업에 종사하는 계층을 일컬었다. 조선 세종 때 도살업에 종사하는 양수척(화척)을 백정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기존의 백정이 양수척과 함께 백정으로 불리는 것을 꺼리면서 백정의 의미가 바뀌었다.

 

지역의 자율성에 기반한 사회 운영

고려 정부는 지역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국가를 운영하였다. 고려 시대에 지역민은 촌에 소속되었으며, 몇 개의 촌이 모여 군현을 이루었다. 군현의 운영은 호장을 중심으로 하는 향리 집단이 주도하였다. 군현은 자체적인 군대를 보유하였고, 상급 향리가 장교가 되어 지방군을 이끌었다. 또한, 각 지역은 독자적인 문화와 신앙을 보유하였다.

고려에서는 지역 간 위상의 차이가 있었다. 향 부곡 소 등 특수 지역은 일반 군현보다 차별받았고 주현과 속현 간에도 차이가 있었다. 이에 따라 적에게 항복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군현은 속현이나 특수 지역으로 낮추었다. 공을 세우면 특수 지역은 군현으로, 속현은 주현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에서는 본관제를 시행하여 주민들에게 소속된 지역을 확인시키고 그 거주 지역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본관이 일반 군현인지 향 부곡 소인지에 따라서도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다.

한편, 고려 시대의 지역민은 향도라는 공동체 조직을 만들었다. 고려 전기의 향도는 군현을 아우르는 규모로 사원 조성, 매향 등 불교 신앙 활동을 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규모가 축소되어 마을 제사나 상장례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였다.

본관제

이름 앞에 출신지를 표기하게 한 제도이다. 고려에서는 출신지를 본관으로 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도 호적에는 원래의 본관을 기재하였다.

매향

불교 신앙의 한 형태로, 향나무를 강이나 바닷가에 묻으며 내세의 복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백정에서 정호로의 승격

고려 시대에는 정호가 사망하면 그 직역과 토지를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해당 직역을 담당할 정호가 부족하면 백정층에서 정호를 충당하기도 하였다.

각 역()의 정호를 나누어 6()로 하였다. ...... 1과는 정() 75, 2과는 정 60, 3과는 정 45, 4과는 정 30, 5과는 정 12, 6과는 정 7이다. ...... 토지가 있으나 정호의 수가 부족하면 그 역의 백정 자제 중 자원하는 자로 충당하여 세웠다. - 고려사

 

수평적인 가족 관계

고려의 가족 제도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비교적 수평적이었다.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고, 호적에는 성별이 아닌 태어난 순서대로 올랐다. 여성의 요구에 의한 이혼도 가능하였고, 배우자가 사망하면 재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또한, 사위가 처가로 장가들어 사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부부는 각자 재산을 소유하다가 아들과 딸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으며, 자식이 없는 경우 각자의 혈연에 재산을 상속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가족 친족 관계에서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의 권리와 의무가 동등하였다. 상피제가 적용되는 친족의 범위는 삼촌과 외삼촌, 고모부와 이모부, 모든 사촌으로 균등하게 확대되었다. 어머니 쪽 조상에 힘입어 음서를 받을 수 있었고, 국왕이나 공신의 자손은 여성으로만 이어지는 계보에서도 음서를 받을 수 있었다. 정호의 직역과 토지를 물려줄 때도 아들이 없으면 친손자와 외손자, 사위나 조카에게 상속하였다. 친족 용어도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을 구분하지 않고 같게 불렀다.

 

고려 사회의 특징

부곡인 유청신

유청신은 장흥부 고이부곡 사람이다. 법도에 부곡리는 공이 있어도 5품을 넘을 수 없었다. ...... 몽골어를 익혀 원에 사신으로 가서 잘 응대하였다. ......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에 임명되었다. ...... 고이부곡을 고흥현으로 승격하였다. - 고려사

순비 허씨

순비 허씨는 공암현 사람으로 중찬 허공의 딸이다. 일찍이 평양공 왕현에게 시집가서 34녀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남편인 왕현이 죽었다. 충선왕이 부인으로 맞아들였다가 즉위하면서 허씨를 순비로 책봉하였다. - 고려사

호장의 아들 이영

이영의 아버지 이중선은 안성군의 호장으로 있었다. ...... 이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리가 되고자 문서를 정조주사에게 제출하였는데, 절을 하지 않았다. 주사는 화가 나 욕을 하였다. 이영은 문서를 찢어버리며 내가 과거로 조정에 나갈 수 있거늘 어찌 너 같은 무리를 공경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영은 급제하여 사관과 대간을 역임하였다. - 고려사절요

노비 평량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의 집안 노비로, ...... 농사에 힘써 부유하게 되었다. 그는 권세가 있는 중요한 길목에 뇌물을 바쳐 천인에서 벗어나 산원동정의 벼슬을 얻었다. 그의 처는 소감 왕원지의 집안 노비인데, ...... 평량이 ...... 길에서 몰래 처남과 함께 원지 부처와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그 주인이 없어졌으므로 계속해서 양인으로 행세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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