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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무신 정권이 성립하고,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다.

by 변교수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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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신 정권이 성립하고,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다.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무신 정권의 집권자 최우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개경의 백성은 장맛비를 맞으며 강화도로 들어갔다. 최우는 강화도에 궁궐을 짓게 하고 몽골이 재차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된 성을 쌓도록 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고려 시대에 통치 체제가 안정되면서 문벌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특권을 누리며 점차 보수화되었다. 숙종과 예종은 지방 출신 인물을 등용하여 문벌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한편, 여진 정벌이 실패로 끝나면서 정벌에 반대하던 보수적 문벌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이자겸이 왕실의 외척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자 인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이자겸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자겸과 척준경 등은 궁궐을 불태우고 왕위를 넘보았다(이자겸의 난, 1126). 이 무렵 금이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이자겸 등의 주장에 따라 고려는 금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왕권의 위협을 느낀 인종은 이자겸에 반대하는 문벌 세력의 협조를 얻어 이자겸을 몰아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금에 대해 사대에 반대한 인물들이 칭제건원론을 주장하며 자주적 세력을 형성하였다. 인종은 윤언이 등 자주적 문벌과 묘청,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을 중용하였다. 서경 세력은 풍수 도참사상을 내세워 서경으로 천도하고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종도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천도할 뜻을 보였으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세력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결국, 인종이 서경 천도를 포기하자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135). 김부식은 서경 천도를 지지한 정지상 등을 제거하고 반란 진압에 나섰고 서경을 함락한 뒤 윤언이마저 쫓아냈다.

문벌

고려 시대의 문벌은 여러 대에 걸쳐 고위 관리를 배출하였고, 서로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키웠다.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음서와 공음전의 특권을 누렸다.

칭제건원 칭하다 황제 세운다

연 호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서경 천도를 둘러싼 여러 주장

묘청

서경 임원역의 땅을 보니 음양가가 말하는 대화세(大華勢)라서 궁궐을 세우고 여기로 옮겨 지내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을 것이요, 금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신하가 될 것입니다.

윤언

이연호를 세우고자 청함은 우리 임금을 높이는 정성에 근본 한 것입니다. 신이 대화(大華)라는 말에 참여하지 않았음은 폐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김부식

여름에 서경 대화궁 30여 곳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그곳이 길한 땅이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서경은 추수가 끝나지 않았는데 거동하신다면 농작물을 짓밟을 것이니 백성을 사랑하는 본의가 아닙니다.

 

무신 정권의 수립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중앙 지배층은 더욱 보수화하였으며,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차별하였다. 이에 정중부, 이의방 등은 무신 정변을 일으켜 무신 정권을 수립하였다(1170). 무신 정권 초기에는 최고 회의 기구가 된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 무신과 문신의 관직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한 문무 겸직제를 시행하여 무신이 재신과 추신이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집권자가 자주 바뀌었고, 무신들이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백성을 수탈하여 농민과 천민이 봉기하는 등 사회가 혼란하였다.

무신 정권은 최충헌이 정권을 잡으면서 점차 안정되었다. 최충헌은 사병 조직인 도방을 확대하여 호위를 강화하였고,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정책을 결정하였다. 뒤이어 집권한 최우는 인사를 담당하는 정방을 자신의 집에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서방을 두어 능력 있는 문신들의 자문을 얻었고, 야별초를 조직하여 치안을 안정시키고 정권을 보호하게 하였다.

 

몽골의 침략과 무신 정권의 몰락

무신 정권이 안정될 무렵 북방에서 몽골이 세력을 넓히자 고려는 국교를 맺어 평화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몽골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몽골은 자기 나라 사신이 귀국길에 살해당한 것을 빌미로 고려를 침입하였다(1231). 최우는 강화를 요청하여 몽골군을 물러나게 하는 한편,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고려는 백성을 중심으로 처인성, 충주성 등에서 몽골군에 항전하였으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력이 약화하였다. 몽골이 고려에 항복 조건을 낮추어 제시하자 무신들은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몽골과 강화를 추진하였다. 때마침 몽골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1259). 이후 원종과 무신 정권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원종은 몽골의 지원을 받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1270). 무신 정권의 군사 기반이었던 삼별초가 이에 반발하여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저항하였으나 결국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

 

고려와 몽골이 합의한 강화 조건

몽골의 침입에 맞서 고려의 백성이 적극적으로 항전하자 몽골은 고려에 요구하였던 항복 조건을 점차 낮추었다. 1259년 고려의 태자(훗날 원종)는 몽골의 쿠빌라이를 만나 고려의 독립과 풍속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

고려의 풍속은 바꾸지 않는다.

조정에서 파견한 사람만 고려에 가고 다른 세력의 사신은 금지한다.

개경 환도는 고려가 국력을 회복한 뒤에 한다.

몽골군은 가을을 기한으로 압록강 밖으로 철군한다.

설치하였던 다루가치는 모두 돌아오게 한다. - 고려사

 

고려 전기와 무신 정권기의 정치 체제 비교

고려 전기의 정치 운영

고려의 문신 왕가도는 거란이 압록강 남쪽에 설치한 성과 다리를 허물고 붙잡아 둔 고려의 사신을 돌려보내라고 거란에 요구할 것을 건의하였다. 거란에 이를 요구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고려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대책을 논의하게 하였다. 서눌 등 29명은 거란과 우호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하였고, 황보유의 등 39명은 우호 관계를 지속할 것을 주장하였다. 왕은 서눌 등의 의견에 따라 사신 파견을 중지하되, 거란의 연호는 계속 사용하기로 하였다. - 고려사

무신 정권 초기의 상황

이의민이 두경승과 함께 재상이 되어 중서성에 있으면서 어떤 사람이 용맹함을 자랑하기에 내가 그 사람을 이렇게 때려 눕혔소.”라고 하며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흔들렸다. 두경승이 말하기를, “언젠가 내가 맨주먹으로 치니 사람들이 달아났소.”라고 하면서 벽을 치자 구멍이 뚫렸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나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두렵네. 그 당당한 모습이야말로 진짜 재상답구나!”라고 하였다. - 고려사

최씨 정권기의 권력 기구

최충헌은 권력을 잡은 뒤 시행하려는 것은 반드시 교정도감을 통하였다.

백관이 최우의 집에 가서 인사 관련 장부를 올리니, 최우가 마루에 앉아서 이를 받았다. 이때부터 최우는 정방을 자기 집에 설치하고 정방에서 백관의 인사를 결정하였다.

최우의 문객들은 당대에 이름난 학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세 무리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서방에서 숙직하도록 하였다.

최우는 날마다 도방과 마별초를 소집하여 격구를 하거나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하거나 말을 타고 활을 쏘게 하였다. -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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