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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동요하는 중세 유럽 세계

by 변교수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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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요하는 중세 유럽 세계

십자군 전쟁

11세기 후반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하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로마 교황은 이를 동서 교회 통합의 기회로 여기고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회복을 위한 전쟁을 호소하였다. 여기에 많은 제후와 기사, 상인, 농민 등이 호응하면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1차 십자군 원정 때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점차 전쟁의 목적이 변질되어 제후, 기사, 상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좌우되었다. 결국 십자군 전쟁은 성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끝이 났으며, 전쟁을 이끈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제후와 기사의 세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상업과 도시의 발달

11세기경부터 서유럽에서 상업이 활기를 띠었다. 농업 생산성 증가로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자 이를 교환하는 시장이 서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교역 활동이 활발해졌고 교통로를 따라 도시가 발달하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이 활발해져 상공업 도시가 더욱 발달하였다. 지중해 무역의 거점인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동방 무역으로 번영하였고, 북유럽 도시들은 한자 동맹으로 발트해와 북해 연안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초기 중세 도시는 영주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경제력이 커진 도시민들은 영주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거나 무력을 사용하여 특허장을 받고 자치권을 얻었다. 자치권을 획득한 도시들은 독자적으로 법을 제정하고 도시 행정을 자치적으로 운영하였다. 한편, 도시의 상공업자들은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동업 조합인 길드를 조직하고 도시 행정을 주도하였다.

 

봉건 사회의 동요

상업과 도시의 발달로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봉건 영주는 농노에게 부역 대신 현물이나 화폐로 지대를 내게 하였다. 이에 농노들은 부역에서 벗어났으며,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화폐 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경제적 지위도 향상되었다. 게다가 14세기 중엽 흑사병의 유행으로 유럽 인구가 급격히 줄어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영주들은 농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농노들이 돈을 내고 신분에서 벗어나거나 경작지를 사들임으로써 자영 농민이 되는 일이 증가하여 장원이 해체되어 갔다. 그러나 일부 지역의 영주들은 줄어든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직영지를 확대하고 화폐 지대를 부역으로 되돌려 농노에 대한 속박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에 맞서 프랑스에서 자크리의 난(1358), 영국에서 와트 타일러의 난(1381)과 같은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의 싸움에서 이겨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고 교황을 통제하였다(아비뇽 유수, 1309~1377). 이후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갔으나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각 선출된 교황이 서로 정통성을 내세우며 대립하였다(교회의 대분열, 1378~1417). 이로 인해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자 교회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져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가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였다. 이에 맞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여 로마 교황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한편,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후스를 화형에 처하였다.

 

중앙 집권 국가의 등장

교황과 봉건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국왕은 상공 시민에게 세금을 받아 용병과 관리를 고용하여 세력을 강화하였다. 상공 시민은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상업 활동을 하였고, 신분제 의회에 참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기도 하였다. 영국에서는 13세기경 존왕이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악화된 재정을 개선하려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다가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대헌장을 승인하였다. 그 뒤 성직자, 귀족, 기사, 시민 대표가 참여하는 모범 의회가 소집되었고, 14세기에는 의회가 상ᆞ하원으로 나뉘어져 양원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프랑스는 12세기 말에 필리프 2세가 제후 세력을 누르고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14세기 초에는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였다(백년 전쟁, 1337~1453).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영국이 우세하였으나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군이 전세를 역전시켰다. 백년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영국에서는 백년 전쟁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장미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많은 봉건 제후들이 몰락하면서 영국의 왕권이 강화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정치적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다. 독일은 봉건 제후의 세력이 강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였다. 이탈리아는 교황령, 베네치아, 피렌체 등 도시 국가와 나폴리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아라곤과 카스티야 등 강력한 왕국이 등장하였다. 15세기 후반에는 두 왕국이 함께 에스파냐 왕국을 세우고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통일 국가를 완성하였다. 한편, 12세기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한 포르투갈은 15세기에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였다.

 

봉건 사회를 동요하게 한 백년 전쟁

영국과 프랑스는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인 플랑드르 지방과 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한 귀옌 지방의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영국 왕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면서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된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몰아내고 오늘날 프랑스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백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중앙 집권화에 기여하였다. 전쟁에서 대포가 사용되면서 성곽과 칼을 기반으로 싸우던 봉건 기사 계급은 몰락해 갔다. 이에 따라 봉건 사회가 쇠퇴하였으며 국왕의 군대가 등장하여 왕권이 강화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국민의 애국심이 고양되었고, 전쟁을 통해 영국에서도 민족의식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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