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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서유럽 봉건 사회가 형성되다

by 변교수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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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럽 세계의 형성과 동요

1. 서유럽 봉건 사회가 형성되다

게르만족의 이동

발트해 연안 지역에 살면서 농경과 목축, 수렵 생활을 하던 게르만족은 인구가 증가하고 농사의 비중이 커지자 농사지을 땅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로마에 들어와 용병이나 소작인이 되어 로마 변경 지대에 정착하였으며, 점차 로마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 동부를 공격하자,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로마 영토 안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수많은 게르만족이 부족별로 이동하여 서로마 제국의 영토 곳곳에 정착하거나 나라를 세웠다.

쇠약해진 서로마 제국은 결국 게르만족 출신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하였다(476).

 

프랑크 왕국의 성장과 분열

서유럽 지역에 세워진 게르만 왕국 중에서 프랑크 왕국이 가장 오랫동안 왕국을 유지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원주지를 버리지 않고 이동하여 현지에 쉽게 적응하였다. 또한 5세기 말 메로베우스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가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로마 원주민과의 문화적 마찰을 줄일 수 있었다.

클로비스가 죽은 후 왕실의 내분이 일어나 왕권이 약화되자, 궁재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이 실권을 잡았다. 그는 8세기 초 이베리아반도를 넘어 침입해 온 이슬람군을 물리쳐 크리스트교 세계를 보호하였다(투르ᆞ푸아티에 전투). 카롤루스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을 몰아내고 카롤루스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카롤루스 대제는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크리스트교를 전파하였다. 그러자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한 로마 가톨릭의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800).카롤루스 대제는 궁정 학교를 세워 학문과 문예를 부흥시키는 등 이른바 카롤루스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이로써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 크리스트교가 융합된 서유럽 문화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은 내분을 겪다가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세 왕국은 각각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던 9세기 무렵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노르만족이 이동하면서 유럽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노르만족은 정복 활동을 벌여 유럽 곳곳에 여러 왕조를 세웠다.

 

서유럽으로 진출한 노르만족

노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거주하며 바이킹이라 불렸다. 이들은 농사에 불리한 자연환경 때문에 주로 해안 지역의 약탈을 일삼았다.

9세기부터는 기름진 땅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와 유럽 각지에 진출하였다. 노르만족은 프랑스 북부에 노르망디 공국,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 시칠리아섬과 이탈리아 남부에 시칠리아 왕국, 러시아의 기원이 된 노브고로드 공국을 세우고 서유럽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원주지에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을 건설하였다.

 

봉건 사회의 성립

서유럽은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노르만족,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각 지방 유력자들은 성을 쌓고 무력을 갖추어 기사 계급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기사 계급과 토지 소유자들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역민들을 보호하면서 사회의 지배층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종 제도와 장원을 기반으로 하는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주종 제도는 왕을 정점으로 하여 기사들 간에 형성되었다. 기사들은 봉신이 되어 자신보다 세력이 큰 왕이나 제후를 주군으로 섬겼다. 봉신은 주군에게 군사적 봉사와 충성을 맹세하고, 주군은 봉신에게 봉토를 주어 주종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주종 관계는 어느 한쪽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파기되는 쌍무적 계약 관계였다. 봉신이 주군에게 받은 봉토는 한 개나 여러 개의 장원으로 운영되었다. 봉신은 장원의 영주가 되어 주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재판과 세금 징수를 하는 등 독자적으로 장원을 지배하였다. 장원에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자유민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농노였다. 자유민은 영주에 대한 납세, 군역, 재판의 의무만 졌다. 그러나 농노는 영주에게 예속되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영주에게 부역과 각종 세금을 바치고 장원 내 시설의 이용 비용을 지불해야 하였다. 또한 영주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였다. 다만 농노는 고대 노예와는 달리 집이나 토지 등 약간의 재산을 소유하고 결혼할 수 있었다.

 

크리스트교의 발전과 교황권 확대

로마 가톨릭교회는 서유럽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교황은 대관식을 통해 국왕의 통치권에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였고, 교회는 국왕이나 제후에게서 기증받은 대토지와 이에 딸린 농민을 지배하였다. 이로써 교회 자체가 강력한 봉건 세력이 되었다. 교회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영주, 농노 같은 신분이 성경에 근거한 신의 뜻이라며 중세 사회의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였다. 한편, 교회 세력이 세속화되어 성직자가 혼인을 하거나 성직을 매매하는 등 부패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자 클뤼니 수도원은 청빈, 정결, 순명, 학문 연구, 노동을 권장한 베네딕트 규율로 돌아가 교회를 정화하자며 교회 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한편, 교회는 성상 파괴령을 계기로 대립하다가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에 따라 크리스트교는 서유럽의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유럽의 비잔티움 제국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로 나뉘게 되었다(1054).

11세기부터 교황은 교회를 세속 권력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세속 군주의 성직자 서임을 금지하였는데, 이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무시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였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성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용서를 빌며 굴복하였다(카노사의 굴욕, 1077). 그 후에도 계속된 교황과 황제의 대립은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이 서임권을 차지하면서 끝이 났다. 이후 교황의 영향력은 점차 강화되어 13세기 인노켄티우스 3세 때 절정에 이르렀다.

 

교황권과 황제권의 변화

보름스 협약(1122)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나, 하인리히는 ...... 영적 권력에 의한 모든 서임권을 성스러운 가톨릭교회에 양도하고, 우리 왕국과 제국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교회법에 기초한 선거 및 자유로운 서임이 이루어지는 것을 승인한다. 또한 나는 이 분쟁이 시작되고 나서 내 아버지 시대와 내 시대에 걸쳐 지금까지 탈취해서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소유권과 세속적 권한을 성스러운 가톨릭교회에 돌려준다.

인노켄티우스 3세의 선언

창조주는 위대한 두 광체를 설치하였다. 더 위대한 광체()는 낮을 지배하고 약한 광체()는 밤을 지배한다. 마찬가지로 보편적 교회의 영역에도 창조주는 위대한 두 권위를 임명하였다. 더 위대한 것이 영혼을 지배하고 약한 것이 육체를 지배한다. 이 두 권위란 교황권과 황제권이다.

 

크리스트교 중심의 서유럽 문화

중세 서유럽 학문의 중심은 신학이었다. 철학은 크리스트교의 합리적 이해에 도움을 주는 보조 학문으로 발달하였다. 초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 철학이 발달하였고, 십자군 전쟁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서유럽 세계에 전해지면서 스콜라 철학이 유행하였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신학대전을 집필하고,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오컴과 같은 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간의 이성으로 입증할 수 없다며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중세 초기에는 교회와 수도원에 부속된 교육 기관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12세기 이후에는 유럽 각지에 대학이 세워졌는데, 대학은 자치권을 확보하고 교육 활동을 벌이면서 중세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건축도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11세기에는 돔과 반원의 아치를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하였고, 12세기부터는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특징으로 하는 고딕 양식이 유행하였다.

한편, 문학에서는 기사들의 용맹과 사랑을 그린 기사도 문학이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아서왕 이야기, 롤랑의 노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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