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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북방 민족과 한족의 문화가 만난 위진 남북조 시대

by 변교수 2023.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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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방 민족과 한족의 문화가 만난 위진 남북조 시대

위진 남북조 시대의 전개

후한이 멸망한 이후 중국은 삼국 시대부터 수가 통일할 때까지 분열이 계속되었다(위진남북조 시대). 이 시기에 화북 지방은 북방 민족이 세운 여러 나라가 난립하다가(516),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 통합되었다(439). 북위의 효문제는 균전제를 시행하여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였다. 그리고 한족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한화 정책을 추진하여 선비족의 복장과 언어를 금지하고 중국식 성을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효문제가 죽은 후 한화 정책으로 소외된 선비족이 반란을 일으켜 북위는 분열되었다. 북방 민족을 피해 화북에서 강남으로 내려온 한족은 동진을 세웠다. 이후 남조는 동진이 송, , , ()으로 교체되는 가운데 북조의 군사력에 밀려 영토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한족의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어 경제적으로는 성장하였다. 한편,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관리 선발 제도로 9품중정제가 실시되었는데, 이를 통해 대부분 유력 호족이 높은 관직을 독점하였다. 이들은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문화

위진 남북조 시대에 분열이 지속되면서 남조와 북조의 문화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귀족 사회가 발달한 남조에서는 도가 사상과 청담 사상이 유행하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사회가 혼란하고 소수의 문벌 귀족이 관직을 독점하였다. 이에 지식인 계층은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철학적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를 가리켜 청담 사상이라고 한다. 죽림칠현은 청담 사상을 추구한 귀족들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남조와 달리 북위가 통일을 이룬 북조에서는 유목민의 문화가 한족 문화에 더해졌고(호한 융합), 국가적으로는 유교를 중시하였다. 또한 불교가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수용되면서 왕실과 귀족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다. 서역의 승려인 구마라습은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였고, 동진의 법현은 인도로 순례를 떠나기도 하였다. 불교의 융성으로 윈강 석굴과 룽먼 석굴 같은 대규모 석굴도 조성되었다.

한편, 이 시기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민간 신앙과 불로장생의 신선 사상을 바탕으로 도가 사상이 결합되어 도교로 발전하였다. 도교는 불교의 융성에 자극을 받아 조직을 갖추어 나갔으며 북위의 구겸지에 의해 교단으로 체계화되었다.

예술에서는 귀족의 취미 생활과 정신세계를 반영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문학에서 현실 도피적인 경향을 보여 주는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인기를 끌었고, 회화에서는 인물의 사소한 표정과 몸짓 등이 잘 묘사된 고개지의 여사잠도가 유명하였다.

 

한족 문화와 유목 민족 문화의 융합

북방의 유목 민족이 화북 지방을 지배하면서 유목 민족의 생활 문화가 한족 사이에 퍼져 나갔다. 유목 민족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크고, 바람이 강한 사막과 초원에서 주로 사냥과 목축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따라서 입고 벗기 편하며 바람을 막아 주는 조끼나 숄, 망토 등이 발달하였고, 말을 탈 때 편하도록 소매나 품이 딱 맞는 옷을 주로 입었다. 이러한 의복 문화는 한족의 의복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주거와 음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바닥에 앉아 생활하던 한족들이 유목 민족의 의자(호상)나 침대를 사용하였다. 유목 민족이 먹던 염소와 양의 젖이 한족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요구르트, 버터, 치즈를 만드는 방법이 중국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족 문화와 유목 민족 문화의 융합은 이후 수와 당으로 이어져 중국 문화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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