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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지중해를 호수로 삼은 로마 제국

by 변교수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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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중해를 호수로 삼은 로마 제국

공화정의 발전과 쇠퇴

기원전 8세기 중엽 이탈리아반도에 도시 국가 로마가 건설되었다. 로마는 초기에 왕정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 말 귀족들이 공화정을 세웠다.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들이 원로원을 독점하였고 여기에서 추천한 2명의 집정관이 국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상공업으로 재산을 모은 평민들이 중장 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참정권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점차 수용되어 호민관직과 평민회가 설치되고 12표법이 제정되는 등 평민의 권리가 높아졌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였다. 이후 로마는 카르타고와 지중해 제해권을 둘러싸고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로마ᆞ카르타고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서지중해 일대를 장악하였다.

전쟁 이후 로마의 유력자들은 노예 노동을 이용해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라티푼디움을 경영하였다. 그 결과 자영농이 몰락해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그라쿠스 형제는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여 사회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귀족층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후 로마에서는 귀족파와 평민파의 권력 다툼과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인 정치가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3두 정치를 실시하였다.

 

제정의 등장과 몰락

23두 정치 시기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에서 승리하고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1 시민(프린켑스)’이라 불렀지만 군대 통수권과 재정권 등을 장악하며 황제와 같은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때부터 로마에서는 실질적인 제정이 시작되었다. 이후 5현제라 불리는 다섯 명의 황제가 잇달아 통치하면서 로마는 200여 년간 평화와 안정을 누렸고, 제국의 영토도 최대에 이르렀다(로마의 평화, Pax Romana).

로마는 2세기 말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여 군인 출신 황제가 연이어 등장하였고 속주에서는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잦은 침입으로 농촌이 피폐해졌으며 도시와 상공업이 쇠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산층 자유 시민이 몰락하여 농촌으로 유입되자, 대토지 소유자들은 이들을 소작인(콜로누스)으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하는 콜로나투스를 시행하였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는 등 제국의 부흥에 힘썼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후 로마는 동서로 분열되었다(395). 이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아 476년에 멸망하였다. 반면,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그 이후로도 10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실용적인 로마 문화

로마에서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에 필요한 법률, 건축, 토목과 같은 실용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로마는 정복지를 도로로 연결하여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쉽게 하였으며, 각지에 건설된 도시에 개선문, 원형 경기장, 수도교, 공중목욕탕 등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토목과 건축 기술이 발전하였다.

공화정 초기에 시민법인 12표법이 제정된 이후 로마의 법률은 점차 로마 제국의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만민법으로 확대되었다. 로마법은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집대성되어 유럽 법률의 토대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하여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당시에는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등이 쓴 문학 작품이 명성을 얻었고, 스토아 철학이 유행하였다. 과학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동설을 주장하였으며, 역사에서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등이 쓰였다.

 

크리스트교의 등장과 확산

로마 제국 초기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등장한 예수는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리고 그는 민족과 신분을 초월한 신의 사랑과 평등, 인간애를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그의 제자들이 각지에 전파하면서 노예, 여성, 하층민을 중심으로 크리스트교가 널리 퍼졌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으나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크리스트교를 박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의 교세는 점차 확산되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313)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였고,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392). 크리스트교는 점차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였고,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 로마 문화와 융합되어 유럽 문화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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