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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사림이 성장하고 공론 정치가 이루어지다

by 변교수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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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림이 성장하고 공론 정치가 이루어지다

조선 중종 때 관리가 된 조광조는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펼쳐 실권을 지니고 있던 훈구파의 반발을 샀다. 이와 관련해 훈구 세력이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써 두고 벌레가 갉아 먹게 하여 조광조와 사림을 모함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결국, 조광조와 사림은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중앙 정계에서 제거되었다.

 

사림의 성장과 사화의 발생

15세기 이후 지방에서는 사림이 성장하였다. 사림은 지방에서 학문 연구와 교육에 힘쓴 사대부들로 정몽주, 길재 등의 학통을 이어갔다. 이들은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추구하였으며, 향촌 자치를 강조하였다. 이 무렵 중앙에서는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성종이 사림을 등용하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 언관직에 임명하면서 훈구 세력과 사림은 한동안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이 훈구 세력을 비판하자 두 세력의 갈등이 깊어졌다.

연산군은 활발한 언론 활동으로 왕권을 견제하려 한 사림을 탄압하고자 하였다. 이에 연산군과 훈구 세력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사림을 몰아냈다(무오사화). 이어 연산군은 생모의 폐위와 관련된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을 제거하였다(갑자사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내쫓은 훈구 세력 공신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 세력을 강화하고, 부당하게 공신이 된 일부 훈구 세력의 공훈을 삭제하려 하였다. 국왕과 훈구 세력이 이에 반발하면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이 제거되었다(기묘사화). 이후 명종 때에도 외척 간에 권력 갈등이 일어나 사림이 피해를 보았다(을사사화).

 

현량과의 실시

조광조의 건의로 시행된 현량과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시행된 제도였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왕이 참석한 가운데 구술시험을 치러 관리로 등용하였다. 현량과는 사림이 관직에 진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경연에서 조광조가 중종에게 아뢰기를, “재행(才行)이 있어 임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여, 대궐의 뜰에 모아 놓고 친히 대책(對策)하게 한다면 인물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 한나라 현량과의 뜻을 이은 것입니다. 덕행은 여러 사람이 천거하는 바이므로 반드시 헛되거나 그릇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중종실록, 1518.3. 11

 

붕당 정치와 공론의 형성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사화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계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 중반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사림은 척신 정치3의 잔재 청산을 놓고 대립하였다. 이조 전랑4의 임명 문제를 놓고 갈등이 더욱 심해져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붕당이 형성되었다.

붕당의 형성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함께 학문적 의견이나 출신 지역의 차이가 영향을 미쳤다. 동인은 척신 정치를 철저히 청산할 것과 정치의 도덕성을 강조하였으며, 주로 서경덕과 이황, 조식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반면, 서인은 척신이라도 믿을 만한 인물과는 함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주로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한편, 사림은 공론을 중시하며 이를 통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중앙에서는 3사의 관리들이 공론 형성을 이끌었고, 재야의 산림들은 서원 활동과 상소 등을 통해 공론을 모았다. 붕당들은 서로 다른 공론을 내세워 국정을 주도하려 하였기 때문에 각 붕당의 공론에 따라 정치에 대한 견해 차이가 나타났다. 이 시기 붕당 정치는 붕당 간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견해를 인정하여 상호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운영되었다.

 

붕당 정치의 전개와 특징

이조 전랑직을 둘러싼 갈등

김효원이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심의겸이 반대하였다. 그 후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장원 급제를 하여 이조 전랑으로 천거되었으나, 외척이라 하여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 동인, 서인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효원의 집은 동쪽 건천동에 있고, 의겸의 집은 서쪽 정릉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 이긍익, 연려실기술

공론에 따른 정치

운영홍문관 부제학 정광적 등이 ...... 공론은 국가의 움직이는 힘입니다. 공론이 행해지지 않으면 시비가 밝지 않아 망하는 것이 따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 지금 남은 당인(黨人)에게 죄를 더하는 일로 여러 날 논의하고 있는데 성상의 들으심은 더욱 멀어져 한 번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 죄를 더하지 않는다면 신들이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밝히겠습니다. - 광해군일기, 1608.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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