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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역사 학술/한국사 & 세계사

왜란과 호란이 일어나다.

by 변교수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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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란과 호란이 일어나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주력선은 이층 구조로 만들어진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노 젓는 공간과 전투 공간이 분리되어 넓은 전투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배가 단단하고 무거워 적의 배에 충격을 가할 수 있었고, 포를 쏴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이런 강점을 갖춘 판옥선을 이용하여 해전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왜란의 전개와 결과

일본에서는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대륙 침략을 꾀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빌린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였다(임진왜란, 1592).

조선은 전쟁 초반 국방력의 차이로 일본군에게 밀렸고 일본군은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별도의 조정을 이끌게 하고, 의주로 피란하여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고,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여 조선군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자 일본은 명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3년에 걸친 휴전 회담은 결렬되었고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입하였다(정유재란, 1597). 이에 조선과 명의 군대가 일본군의 북진을 막고 이순신이 명량에서 이들을 대파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였다.

왜란으로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지었다. 인구가 줄었고,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졌고, 원군을 보내준 명에 대해 망해 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라는 의미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하며 숭상하는 분위기가 퍼지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아 에도 막부가 성립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기술자나 학자 등을 통해 인쇄술과 도자기 제조법, 성리학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편, 왜란 이후에도 바쿠후가 국교 재개와 사절 파견을 요청하자 조선 정부는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중국에서는 전쟁의 영향으로 명의 국력이 약화한 틈을 타 여진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외교 정책의 변화와 호란의 전개

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토지 대장을 정비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후 복구에 힘썼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여진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을 공격하였다. 명이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자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강홍립이 이끄는 군대를 명에 파견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서인 세력은 이러한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다(인조반정, 1623).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 배금 정책을 내세워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가도에 주둔 중인 명의 모문룡을 제거하고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정묘호란, 1627).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의병장 정봉수가 용골 산성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자 후금은 조선 정부와 화의를 맺고 돌아갔다. 그러나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조선에서는 화의를 맺자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논쟁 끝에 주전론이 힘을 얻어 청의 군신 관계 요구를 거절하자 청 태종이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였다(병자호란, 1636).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을 꾀하였으나 결국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청과 강화를 맺었다.

 

대외 인식의 변화

병자호란의 결과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자 조선 사회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청에 당한 치욕을 씻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이 중화 문명의 후계자라고 자부하는 조선 중화주의가 나타났다. 중국 본토를 정복한 청은 국력을 강화하였고 문물을 발전시켰다.

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연행사를 파견하였는데, 당시 청에 다녀온 사신들은 청의 문물을 들여와 국내에 소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대외 인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18세기경에는 청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북학론이 제기되었다.

한편, 만주 일대에서 생활하는 조선인이 늘어나자 청과 조선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조선과 청은 대표를 파견하여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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